미국이 키우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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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는 “대량 살상 무기”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 이라크를 “정권 교체”하기 위해서 “제2단계 테러와의 전쟁”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오사마 빈 라덴과 꼭 마찬가지로 전에는 미국의 후원을 받는 우방이었다. 1956년 이집트 총리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이에 기겁한 영국과 프랑스 지배자들은 제3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수에즈 위기”는 중동 전역에서 반제 운동 물결을 일으켰다. 그 여파로 1958년 이라크에서는 민족주의자 압둘 카람 카심 준장이 이끄는 군사 반란이 일어나 친서방 왕정을 무너뜨렸다. 카심 정권은 토지 개혁을 공약하는 한편, 서방 열강과 협상을 벌여 석유 이윤을 더 많이 확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쿠데타 직후 영국과 미국은 각각 요르단과 레바논으로 군대를 보내 카심을 위협했다. 그들은 이라크 바트당을 앞세워 카심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다. 바트당, 즉 아랍사회주의부흥당은 아랍의 통일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주장하며 1943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창설됐다. 바트당의 사회적 기반은 군장교, 공무원, 교사, 상인, 성공한 수공업자나 중·소농 등 중간계급이었다. 그들은 제국주의·봉건제·독점자본주의(대기업)에 반대하면서 기간산업 국유화와 경제 전반의 계획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계급이 행위 주체가 되는 것을 배격했다. 바트당이 추구한 “아랍 사회주의”는 제국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본 축적 기반을 조성하고 이를 현대화하려는 국가자본주의적 ‘계획’ 경제 체제였다.
사담 후세인이 처음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1959년 카심 암살 사건에 가담했다 실패하고 외국으로 도피했을 때였다. 1963년 2월 바트당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카심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집권한 바트당은 이라크 공산당원과 노동조합 투사 수천 명을 살해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쿠웨이트 지부는 바트당원들에게 이라크 공산당원들의 명단과 주소를 알려 주었다. 당시 CIA의 중동 책임자 제임스 크리치필드는 “우리는 그것[군사 쿠데타]을 커다란 승리로 여긴다.” 하고 말했다. 1963년 11월 대통령 알-살람 아리프의 친위 쿠데타로 정권을 상실한 바트당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의 여파로 이라크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이듬해 7월 다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재집권에 성공했다. 바트당 정권은 반제국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를 옹호하지 않았다. 1970년 요르단 국왕 후세인이 자국내 팔레스타인인들을 3만 명이나 학살했다(“암담한 9월”). 당시 요르단에는 이라크 군대 1만 5천 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럼스펠드
1979년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친미 국왕 팔레비가 쫓겨나고,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이슬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세계 자본주의의 핵심 에너지 자원인 석유를 지배하는 미국의 능력과 패권이 위협받았다. 미국은 이슬람주의 혁명이 이란을 넘어 중동 각국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래서 이듬해 9월 이란-이라크 전쟁(제1차 걸프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이라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982년 이라크는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지워졌다. 1983년 12월 전쟁이 한창 고조하고 있을 때,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파견한 중동특사가 바그다드에서 후세인과 회담했다. 그 회담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래로 단절된 미국과 이라크의 외교 관계를 공식 복원하는 길을 열었다. 그 특사는 바로 지금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다. 럼스펠드는 6년 만에 이라크를 방문한 미국 최고위 관리였다. 그는 나중에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우리 둘 다 중동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라크와] 관계를 맺는 것이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말했다.
럼스펠드는 1984년 3월 24일에도 이라크를 방문해 당시 이라크 외무장관 타리크 아지즈와 회담했다. 그가 바그다드를 방문한 바로 그 날 발행된 유엔 보고서는 이라크가 이페릿(겨자처럼 매운 미란성 독가스)을 이란 병사들에게 살포했다고 결론지었다. 당시 럼스펠드는 그 보고서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독가스 제조 기술은 바로 미국이 제공한 것이었다. 미국 상무부가 승인한 계약에 따라 아메리칸 타입 컬쳐 컬렉션(American Type Culture Collection)이라는 회사가 탄저균, 대장균, 식중독을 일으키는 보툴리누스균, 기타 끔찍한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의 숙주들을 이라크에 수출했다.
생화학 무기 제조 기술 수출은 1988년 3월 이라크 군대가 할라비야 마을에서 독가스로 쿠르드족 약 5천 명을 살해한 뒤에도 지속했다. 당시 미국 정보기관의 고위 관리이자 현재 예비역 대령인 월터 랭은 “이라크 군이 독가스를 사용한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고 말했다. 할라비야 학살 사건 뒤 이라크에 대한 경제 제재 요구가 대두했지만,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이라크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헬기·미사일·생화학 약품 등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 수출 건수를 50퍼센트나 늘렸다. 1988년 7월 미국 대기업 벡텔은 이페릿, 연료-공기 폭탄, 로켓 추진체 생산에 이용할 수 있는 화학 물질을 이라크에 제공하는 10억 달러 상당의 계약을 체결했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은 탄저균을 포함해 17건의 세균 배양 기술을 이라크에 수출했다. 또, 레이건과 부시는 미국 정부가 보조하는 대 이라크 식량 원조도 늘렸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비옥한 토지에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이라크가 미국에서 식량을 수입하게 된 것은 쿠르드족 거주 지역에 뿌려진 독가스 때문에 농지가 황폐화돼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89년 12월 파나마 침공 기간에 아버지 부시는 이라크가 미국 농산물과 기타 상품들을 구입할 수 있도록 이라크에 대한 신용 공여를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1987년 5월 이라크 미사일이 미군 구축함 스타크 호를 공격해 미군 37명이 죽었다. 당시 스타크 호는 이라크 군을 지원하기 위해 페르시아만으로 들어오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라크는 가벼운 경고를 받았을 뿐이다! 제1차 걸프전이 끝난 뒤 미국 국무부 차관보 존 켈리는 바그다드를 방문해 후세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동의 현대화 세력인 이라크와 미국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기를 바란다.” 또, 1990년 4월 미국 상원의원들이 이라크를 방문했다. 그들은 쿠르드족의 도시 모술에서 후세인과 회담했다. 상원의원 앨런 심슨은 후세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정부는 당신과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당신을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지원을 과신한 후세인은 4개월 뒤에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이것은 소련이라는 ‘악마’가 사라진 뒤 새로운 ‘악마’를 찾고 있던 미국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은 어제의 ‘동지’를 새로운 ‘악마’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필요에 따라 그 ‘악마’를 구해 주기도 했다.
1991년 2월 제2차 걸프전이 끝난 직후 이라크 남부 시아파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 후세인 정권을 위협했다. 그러나 그 지역 전체를 통제하고 있던 미군 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는 워싱턴의 명령에 따라 그냥 팔짱끼고 구경만 했다. 반군들은 미군에게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전리품으로 획득한 이라크 군 장비들을 이용할 수 있게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군은 이를 거절했다. 사실, 미군은 후세인이 반란군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어떤 조처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라크 군 헬기가 미국이 설정한 비행 금지 구역을 침범해 반란군에게 총탄을 퍼부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미국은 반란이 실패하기를 바랐고, 결국 반란은 실패했으며 후세인의 권좌는 안전해졌다. 그 직후 북부 쿠르드족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똑같은 사태가 재연됐다. 부시 정부는 반란이 성공해서 “바그다드의 야수”가 타도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여론의 항의가 빗발칠 때까지 반란군을 보호하려는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이미 전쟁에서 이겼는데, 쿠르드족과 시아파의 반란이 중동 전역을 불안정하게 만들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당시 부시의 국가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나는 그런 반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구상한 전후 [이라크] 정부는 군사 정부였다.” 〈뉴욕 타임스〉 기자 토머스 프리드먼은 미국 국무부의 방침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라크를 지배하는 것이 “군사 정부의 철권 통치”이면 미국에 유리하며 더욱이 후세인 정권이 아니라면 더욱 좋다는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레이건 정부 관리의 말처럼 “개자식이었다. 그러나 그 때[1980년대]는 우리가 키우는 개자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