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특검과 이건희 퇴진:
희대의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선물한 특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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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이건희는 삼성 그룹의 회장직을 떠난다며 ‘쇄신안’을 발표했다. 삼성 부패의 핵심으로 지목된 전략기획실도 없애겠다고 했다.
그러나 ‘쇄신안’에는 삼성의 온갖 비리와 불법로비, 탈세, 범죄, 무노조 경영 등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담겨 있지 않다. 그래서 김용철 변호사는 “시스템과 체제가 남아 있는 한 같다. 어떤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하며 일침을 놨다.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도 “예정됐던 경영권 세습 수순을 위한 ‘숨고르기’ 밖에 되지 않는다 … 오히려 특검의 면죄부를 바탕으로 경영권 승계가 그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사람만 바꾼 것일 뿐, 이 씨 일가가 오너로 남는다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공안검사 출신의 특별검사 조준웅이 이건희에게 선물한 확실한 면죄부 덕분에 이런 일이 가능해졌다.
조준웅은 ‘떡값’ 검사·정치인·관료 들은 아예 소환도 하지 않았다. ‘차명계좌 없는 사람이 어딨냐’며 되려 사람들을 나무라고, 알아내지 못한 건 모두 ‘무혐의’ 처리하는 것도 모자라 드러난 범죄도 “개인적 탐욕”과는 다른 목적이었다며 이건희의 ‘특별’ 변호사 노릇을 했다.
국민 세금 28억 원을 쓰면서, 4조 5천억 원의 차명계좌를 일일이 찾고 세탁해 이건희에게 고스란히 바친 것이 조준웅 특검의 성과였다. 검찰 관계자조차 “‘특수성을 감안한 평등성’을 두 자로 바꿔 말하면 ‘특혜’”라고 꼬집었다. 부패한 우익을 대변하는 〈조선일보〉 김대중조차 “너무도 적나라한 불평등이요 차별 … 삼성 특검은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했다” 하며 우려할 정도다.
이명박에게 면죄부를 준 BBK 특검 정호영의 뒤를 이어 조준웅은 아예 “특검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거대한 부패 사건에 분노한 사람들의 면전에 재를 뿌렸다.
면죄부
이번 특검은 거대한 떡값의 그물망을 통해 이건희와 한통속으로 연결된 한국의 정부·국가·사정기관 등으로는 삼성의 범죄와 부패를 끝장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줬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는 수많은 검사·판사·정치인들이 유착과 부패의 고리 속에 혼연일체로 융합돼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추악한 부패가 연일 폭로되는 가운데서도 삼성에서 돈과 사람을 지원받은 이명박, 노무현, 한나라당, 민주당 등은 앞뒤를 다퉈 가며 삼성을 비호했다. ‘이건희 봐주기’를 시작한 민주당이 그것을 마무리한 이명박 정부를 “재벌 봐주기”라고 비판하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부패는 이 나라 지배자들의 역사에 깊이 아로새겨 있다. 이승만·박정희 시절 정권과 결탁해 몸집을 불려 온 재벌들과 그들의 지원으로 권력을 유지해 온 정치인들 사이에 만들어진 부패의 그물망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사유화와 규제 완화는 새로운 부패의 그물망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부패는 줄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99년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과 옷 로비 사건으로 처음 시작된 특검도 지금까지 여덟 차례나 있었지만 대부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삼성 특검이 대단한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많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24일에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무려 56퍼센트가 삼성 특검에 큰 기대를 안 한다고 대답했다.
결국 삼성 특검은, 재벌과 정치인들은 아무리 더러운 비리를 저지르고 떡값을 받아먹어도 안전하다는 노골적인 ‘유전무죄 무전유죄’만 확인해 주며 끝났다.
그러나 지난 몇 년 사이에 삼성의 부패와 범죄를 반대하는 여론과 광범한 사회 운동이 지속돼 왔다.
이런 운동과 여론의 압력 때문에 그토록 삼성을 비호하려 애쓰던 기성 정치인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특검법을 통과시켰고, 면죄부 특검이 끝나고도 이건희는 자신의 퇴진을 포함한 ‘쇄신안’이나마 내놓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건희 반대 시위로 출교된 고려대 학생들은 7백 일이 넘는 투쟁 끝에 지난 3월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수많은 시민·사회 단체들과 박노자, 홍세화, 노회찬·임종인 의원 등이 이 투쟁을 지지했고 이들의 승리는 이건희에 맞서 싸우는 투쟁에 커다란 자신감을 줬다.
또, 지난해 3월부터 삼성의 부당 해고에 맞서 싸운 삼성SDI 사내하청 여성 노동자들은 1천5백여 명이 참여한 금속노조 울산지부의 연대 파업을 이끌어냈다. 이런 투쟁은 ‘불패의 무노조 신화’ 삼성을 뒤흔들었고 24명 전원 재고용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따라서 삼성의 부패와 범죄에 맞서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욱 아래로부터 대중운동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1995년 전·노 구속 투쟁에 버금가는 투쟁”(노회찬 전 의원)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그 때 우리는 죄수복을 입은 이건희를 TV에서 보게 될 수도 있다.
두 살인마를 처벌한 대중투쟁의 힘
1995년 7월 18일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해 전두환·노태우 두 광주 학살자에게 면죄부를 줬을 때만 해도 불과 몇 달 뒤 이들이 철창 안에 갇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소시효가 만료돼 앞으로는 이들을 처벌할 방법이 없어진다는 생각에 좌절한 사람들도 많았다.
노태우는 검찰 발표에 기세등등해져서 “문화대혁명 때 수천만 명이 희생을 당하고 엄청난 피를 흘린 것에 비하면 광주 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며 사람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학살자들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이 자들을 처벌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특별검사제가 삼권 분립에 위배된다는 둥,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둥 핑계만 댔다.
그러나 같은 해 5월부터 대학에서 전두환·노태우 등 5·18 관련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며 벌어진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9월 29일에는 전국 1백여 개 대학에서 동맹휴업이 벌어지고 서울에서만 2만 명이 시위를 벌이는 등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5천 명이 넘는 교수들이 연대 서명에 동참했고 한국노총이 조직한 비자금 규탄 집회에 7천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60만 명이 학살자 처벌을 요구하는 서명을 했다.
결국 운동의 압력에 밀려 검찰은 11월 6일 노태우를 구속했고 한 달 뒤에는 전두환도 구속했다. 그로부터 또 한 달 뒤에는 공소시효를 무시하고 이 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법이 제정됐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법원에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비록 2년 뒤 김영삼·김대중이 공모해 두 살인마를 풀어줬지만, 이 투쟁의 교훈은 여전히 의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