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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 불황

새로운 세계 불황

크리스 하먼《오늘의 세계 경제 : 위기와 전망》(갈무리),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책갈피),

《민족 문제의 재등장》(책갈피)의 저자

“미국은 불황의 초입 단계에 들어섰다. 이 불황은 제2차세계대전 이래로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고 치유하기 힘들며, 심지어 전 세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난 10월[2001년 10월 ― 옮긴이] 비주류 경제학자 웨인 고들리는 이렇게 썼다. 고들리는 2년 전[1999년 말 ― 옮긴이] 미국 주식 시장이 어지러울 정도로 폭등했을 때 불황을 예견한 몇 안 되는 경제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지난 1월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경기 상황을 ‘둔화’ 또는 ‘조정’ 국면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의 경기 침체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고 장기적일 거라고 예상할 수 있는 이유가 충분히 많다. … 정말이지, 세계 경제 전체가 1930년대 이래로 가장 심각한 침체를 겪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비행기 자살 테러 전부터 위기는 시작됐다. 테러 1주일 전에 〈파이낸셜 타임스〉는 통신 산업의 위기를 다룬 3부작 기사에서 “1조 달러나 되는 부가 날아가면서 세계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고 말했다.

위기의 근본 원인

미국 경제가 침체로 나아가는 주된 요인은 다음과 같다.

(ⅰ) 정보 통신 산업 위주의 ‘신경제’는 미국 경제의 기본적인 흐름을 바꿔 놓지 못했다. 신경제는 어떤 분야에서는 생산성을 높였지만 각종 매체에서 떠들어 댄 것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폭발적인’ ‘새 시대’였던 1920년대의 더 커다란 생산 혁명이 호황을 무한정 유지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경제도 호황을 한없이 지속할 수는 없었다.

(ⅱ) 호황의 진정한 추진력은 1980년대에 일본의 경쟁적인 도전에 대응해 이뤄진 대규모 산업 합리화였다. 이 합리화는 착취율의 막대한 증가와 결합돼 있었을 뿐 아니라 이에 기초하고 있었다.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시간을 늘린 덕분에 미국의 지배계급은 대략 1970년대 중반의 이윤율 수준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당시의 이윤율조차 1940년대에서 1970년대의 장기 호황기의 높은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ⅲ) 미국 경제가 주요 경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급속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전 세계 투자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주가가 크게 치솟으면서 경제의 실제 이윤 수준과 완전히 멀어졌다. 주식배당률은 지난 50년 평균의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그와 동시에, 자금 유입 덕분에 기업이나 소비자 모두 대규모 대출이 가능해졌다. 이런 흐름은 미국의 전체 소비가 전체 소득에 비해 약 6퍼센트나 초과할 때까지 계속됐다.

(ⅳ) 호황은 두 가지 모순적인 일들이 동시에 일어날 때만 유지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즉, 주가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이윤이 증가해야 하는데 이것은 착취율 증대를 뜻한다. 다른 한편, 소비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임금이 올라야 하는데 이것은 착취율 하락을 뜻한다. 이 근본적인 사실은 몇 달 동안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느 순간 거품은 터질 수밖에 없다.

사실, 상황은 이보다 훨씬 더 나빴다. 이런 급격한 호황으로 인해 많은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윤을 크게 부풀려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호황에서 불황으로 전환

2001년의 첫 아홉 달 동안에는 모종의 호황이 유럽과 북미에서 계속됐다. 그것은 소비 호황이었지만, 핵심 산업들에서는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이윤이 하락했다는 발표가 시작됐고, 주가는 느리지만 상당히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2001년 여름에는 ‘두 경제’라는 말이 등장했다. 서비스와 개인 소비 부문은 여전히 호황이던 반면, 제조업과 산업 부문은 점차 침체하고 있었다.

9·11 테러가 경제에 미친 영향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소비 거품을 터뜨렸다는 점이다. 9·11 테러가 기업들이 형편없는 이윤과 노동자 해고를 서둘러 발표할 수 있게 해 준 연막이 되기도 했다. 10월 말 〈파이낸셜 타임스〉는 “미국의 대기업 이사들에 따르면, 테러 공격이 기업의 비용과 [경영] 전략에 미친 영향은 예상보다는 미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영진들이 이미 진행중인 것으로 믿고 있던 경기 후퇴의 효과를 보면서 대기업들은 경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많은 자본주의 지지자들이 지난 27년 동안에 나타난 경기 후퇴를 매번 특별한 사건 탓으로 돌리려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0년대 초반의 경기 후퇴는 제2차 걸프전에서 비롯한 유가 인상에서 비롯했다는 주장들이 자주 등장했다. 사실, 1990년과 1991년의 평균 유가는 그 전보다 높지 않았다. 유가는 한두 달 치솟았다가 급격하게 하락했다. 경기 침체는 몇몇 외부 요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부 동역학에서 비롯했다. 특히 선진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현재의 경기 침체도 마찬가지다.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는 미국 주가 수준에 가장 극적인 효과를 미쳤다. 주식 시장이 다시 열린 첫날 다우존스 산업 평균은 684.81포인트 떨어졌다.

주식 시장 수준은 자본가 계급 전체에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자본가들이 소유한 주식과 기업 이사들에게 돌아가는 스톡 옵션의 현금 가치를 결정한다. 그러나 주식 시장은 이들이 지배하는 체제의 동역학 면에서는 그처럼 중요한 구실을 전혀 하지 못한다. 신규 투자는 주식 시장을 통해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식 시장의 주된 기능은 이미 존재하는 기업의 주식을 거래하는 시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사실 주식 시장은 중개 시장이다. 이 시장이 자본주의의 주된 사업 ― 생산 현장에서 착취를 통해 잉여가치를 축적하는 일 ― 과 맺는 관계는 중고차 중개업자와 거대 자동차 제조업체 간의 관계와 비슷하다.

주식 시장의 폭락은 가끔 체제 전체에서 근본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나타내며, 주식 시장의 활황은 가끔 체제가 더 건강해졌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주식 시장의 폭락이나 활황과 실물 경제의 호황과 불황 사이에는 자동적인 연관은 없다. 예컨대 제2차세계대전의 초기 단계였던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다우지수는 40퍼센트 떨어졌다. 하지만 미국 자본주의는 전례 없는 대호황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번에도 주식 시장과 실물 경제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점은 몇 주도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실물 경제는 계속 후퇴하면서 대규모 정리해고와 이윤 하락에 대한 보고가 잇따랐지만 미국과 영국의 주식 시장은 오르기 시작했다!

경제에서 정치로

호황에서 경기 후퇴로의 전환은 부드럽고 순조로운 하강이 결코 아니다. 호황기에는 다른 기업보다 투기에 더 열을 올리는 기업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경기가 하강하면 특히 타격을 받는 일부 산업도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겉보기에 순조로운 경기 후퇴 시기에도 대기업과 심지어 전체 산업이 갑자기 붕괴 일보직전에 몰리는 급작스런 위기가 간헐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양이 질로 바뀌듯이, 경제 붕괴가 갑자기 정치 격변을 초래한다. 정부는 대자본가들의 필사적인 요구와 수많은 노동자들의 갑작스런 고통에 직면해서 마냥 손을 놓고 있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정부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사회 전체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부각시킨다.

미국에서는 몇 가지 문제가 벌써 표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쌍둥이 빌딩의 붕괴가 초래할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 지출을 늘렸다. 몇몇 부분은 국가 개입이라는 이 케인즈주의적 방식의 부활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조처라며 환영하고 있다. 이 조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의존하면서 생겨난 피해를 바로잡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케인즈주의적 방식들도 1990년대 말의 호황에서 발전한 미국 경제의 근본적 불균형을 해결할 수 없다. 주요 산업에서 투자는 이윤의 원천보다 훨씬 더 많이 증가했고, 현재 이윤율의 하락은 불가피한 결과였다.

이윤율은 한편으로는 많은 기업의 파산을 통한 대규모 산업 구조조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회복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종업원 수를 줄이고 임금을 삭감해 착취율을 크게 높이지 않고서는 회복될 수 없다. 특히 후자의 일이 항공 산업, 항공 우주 산업, 호텔 산업에서는 벌써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이런 조치들은 위기를 심화시키고, 소비를 더욱 감소시키며, 결국 경제 전체에 파급 효과를 미칠 수 있다. 기업과 개별 소비자들은 채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비를 필사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전쟁과 경기 침체

미국이 전쟁에 의존한 것은 모순된 효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미국 군부는 특정 산업에 돈을 쏟아 부어 시장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버팀목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부시는 스타워즈 속편을 밀어붙이기가 더 쉬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한편으로, 불안감 때문에 기업가와 소비자의 자신감이 타격을 더 크게 입을 수 있다.

전쟁은 종종 정치의 불안정을 낳고, 이 불안정이 격화돼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배자들의 결정적인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혁명적 격변의 가능성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 지 몇 주 만에 그들이 걱정에 빠지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 정부의 군사적 행동에 제약을 가한 요인이었다. 언론 논평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집트 같은 나라에서 혁명적 격변이 일어날 가능성을 공공연히 지적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을 격화시킨 것을 두려워한다.

다른 한편, 경기 침체의 심화로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불안정이 증대할 것이다. 유럽에서는 1990년대 초반에 드러난 추세들이 가속화할 전망이다. 이 추세는 “슬로 모션으로 돌아가는 1930년대”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중도파가 극우 세력이나 부활한 좌파 세력으로 양극화하는 것을 말한다. 1990년대 초 이래 중요한 변화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성장이다. 이 운동은 대개 지금의 반전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위기가 낳은 갑작스런 고통의 초점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10년 전에는 거의 가능하지 않던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제3세계의 일부에서도 “슬로 모션으로 돌아가는 1930년대”를 목격할 수 있다. 즉, 경제 위기가 심화해 낡은 정치 구조와 이에 의존하는 국가를 불안정에 빠뜨리고 있다.

사태가 얼마나 악화할 수 있는지는 아르헨티나가 9월 11일 훨씬 전부터 보여 주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3년 간의 경기 침체 뒤에 교육 예산을 대폭 삭감하려다가 올 봄에 위기에 빠졌다. 그러자 경제 장관직을 도밍고 까바요에게 맡기면서 시간을 벌었다. 까바요는 지난번 선거에서 패배해 교체된 정부에서도 경제 장관을 지낸 바 있었다. 그는 잠시나마 언론으로부터 아르헨티나의 구세주라는 칭송을 받았다. 여름에 그는 IMF 차관 80억 달러를 받는 대가로 훨씬 더 가혹한 삭감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경제는 계속 추락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10월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유권자들이 백지 투표를 했으며, 야당인 페론주의 정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유권자의 4분의 1은 다양한 극좌 정당을 지지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아르헨티나 정부가 페소화 평가절하와 일부 외채에 대한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여긴 것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페소화 평가절하와 채무 불이행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약간 회복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국제적으로 파괴적인 충격을 미칠 수 있다. 채무 불이행은 아르헨티나에 대출해 준 은행들(주로 미국계 은행들)에 피해를 입힐 것이고, 그래서 다른 은행들이 다른 나라들에서 자금을 회수하게 해 그 나라들을 파산으로 몰아갈 것이다. 이런 나라들 가운데 일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터키는 1년 동안 아르헨티나와 쌍벽을 이루면서 국제 금융가들을 걱정스럽게 만든 나라였다. 이집트는 10년 전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을 후원한 대가로 외채를 일부 청산했는데도 아직도 많은 외채를 안고 있다. 파키스탄의 외채 부담액은 3백70억 달러나 되지만 지금까지 제공된 구제 금융은 미미한 액수다. 현재 파키스탄 정부 수입의 60퍼센트 이상이 외채 이자로 지급된다. 앞으로 예정돼 있는 채무 재조정을 거치더라도 그 수치는 50퍼센트로 줄어들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나라의 수출은 미국·일본·유럽 경제의 침체로 인해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런 사태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빈곤을 증대시킬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불만이 거리에서 폭발해 정부 전복으로 나아갈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더 이상 신기한 일만은 아니게 됐다.

전 세계 지배계급의 변호론자들은 단기적인 경기 침체가 호황기의 과도함을 ‘바로잡아’ 줄 것이며, 재빠른 군사적 승리는 중동에 있는 미국의 예속 정권들에 대한 위협을 제거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만 된다면 그들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이다. 그들의 경제가 도처에서 미끄러지고 있는 지금, 가연성 물질로 가득 찬 지역에서는 부시와 블레어가 시작한 전쟁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온갖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