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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수현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엿새 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이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침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 2만 5천 명을 파병하겠다고 발표했다. 부시는 미군이 중동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이며 미군의 임무는 “전적으로 방어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순전한 거짓말이었다.

부시와 그 참모들은 몰래 끔찍한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 달 뒤에 미군 장성 마이클 듀건은 그 계획의 일부를 누설했다. 바그다드와 그 밖의 다른 민간인 거주 지역을 공습하고 사담 후세인을 암살한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솔직했던 듀건은 자리에서 쫓겨났다.

전쟁 개시 전까지 5개월 동안 부시는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들을 죄다 동원했다. 침략에 맞서야 한다, 약소국을 보호해야 한다, 독재자와 대결해야 한다, 핵무기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등등. 그러나 진정한 목적은 석유와 패권이었다.

1980∼88년의 이란-이라크 전쟁 때문에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른 이라크는 석유를 대거 수출해 수입을 올리려 했다. 그러나 쿠웨이트가 세계 시장에 석유를 덤핑 판매했다. 이 때문에 유가는 하락했고 이라크의 곤경은 더욱 가중됐다. 이라크는 양국 접경 지대의 루말라 유전에서 쿠웨이트가 이라크 석유를 훔쳐간다고 비난했다.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미국은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미국 대사는 후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국경 분쟁…에는 관심 없다.” 그러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 합병하자 서방의 태도는 1백퍼센트 바뀌었다. 미국의 전직 고위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쿠웨이트가 당근을 키우고 있었다면, 우리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부시는 이라크 공격이 미국의 패권을 재천명할 수 있는 호기라고 생각했다. 당시는 냉전이 막 끝났을 때였다. 미국 지배자들은 독일이나 일본 같은 경제적 경쟁국과 중국과 러시아 같은 군사적 경쟁국들이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까 봐 걱정했다. 부시는 전쟁을 통해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경쟁국들이 미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 질서”에 순응하게끔 단속하려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 국방부 보고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첫번째 목표는 옛 소련을 대신해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새로운 라이벌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전략은 전 세계에서 미래에 잠재적 경쟁자로 떠오를 수 있는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사전 예방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부시는 많은 국가들을 회유하고 협박해서 반이라크 전선을 결성했다. 특히, 아랍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세계은행에 압력을 넣어 이집트의 외채 1백40억 달러를 탕감해 주었다. 시리아가 레바논의 우파 정부를 타도하고 친시리아 정부를 세우도록 허용해 주었다.

또, 소련이 리투아니아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는데도 미국은 침묵을 지켰다. 중국에도 차관을 제공했고, 1989년 천안문 학살 이후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예멘처럼 미국의 말을 듣지 않은 나라들은 가혹한 보복을 당했다.

미국은 이라크 경제 봉쇄를 강요하는 유엔 결의안이 통과되기도 전에 군대와 전함을 페르시아만으로 보냈다. 미국은 협상을 통해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까 봐 우려했다. 그래서 프랑스, 러시아, 아랍 국가들이 중재에 나서지 못하게 애를 썼다. 1991년 1월 15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철수 시한이 만료되기 몇 시간 전에 프랑스가 평화안을 제시했다. 안보리 이사국들은 대부분 그 평화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사막의 학살

1991년 1월 17일 바그다드 공습으로 시작된 “사막의 폭풍” 작전은 어떤 의미에서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다국적군은 역사상 그 어떤 공습보다 단기간에 많은 폭탄을 투하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이라크의 민간 사회기반시설을 표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도로·철도·교량·상하수도·공장·발전소 등을 초토화시켜 이라크를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이라크인 20만 명이 학살당했다.

“벙커 버스터”(땅 속 깊은 곳에 있는 콘크리트도 뚫고 목표물에 도달할 수 있는 지하 엄폐 시설 파괴 폭탄)로 파괴당한 바그다드의 한 지하 방공호에서는 무려 4백여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1991년 2월 15일 후세인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라는 유엔 결의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후세인의 항복을 거부했다. 미국은 어떻게든 지상전을 감행하고 싶었다. 엿새 뒤에 미군과 다국적군이 쿠웨이트와 이라크 남부로 진격했고 이라크 군대는 퇴각했다.

2월 28일 부시가 휴전을 선포하기 직전에 미군과 영국군은 무방비 상태로 퇴각하는 이라크 병사들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쿠웨이트에서 이라크의 바스라로 가는 도로 위에서는 잔혹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허둥지둥 도망치던 이라크 병사들을 다국적군 탱크 부대가 가로막았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이라크 병사들에게 미군 비행기들은 폭탄을 퍼붓고 기총소사를 해댔다. 약 80킬로미터에 걸친 고속도로 위에서 이라크 병사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 미군은 이라크 병사들의 시체를 불도저로 밀어내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다. 바스라 도로는 “죽음의 고속도로”가 됐다.

휴전 직전에 부시는 이라크 국민들에게 봉기를 일으켜 후세인을 타도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남부의 시아파와 북부의 쿠르드족이 후세인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을 때,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봉기하자 평범한 이라크인들도 후세인 정권의 경찰 본부, 병영, 감옥 등을 습격했다. 군중은 지하 감옥으로 쳐들어가 고문실을 파괴하고 수십 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정치수들을 석방했다. 또, 후세인 정권의 관리들에게 린치를 가했다. 거의 2주 동안 이라크 민중이 전국을 통제했고 후세인 정권은 거의 붕괴할 듯했다.

바로 그 때 미국 정부가 나서서 후세인을 도와 주었다. 부시가 원한 것은 반후세인 군사 쿠데타였지 (아래로부터의) 민중 봉기가 아니었다. 이라크의 민중 봉기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의 다른 친미 독재 국가 민중에게 “잘못된 본보기”가 될 수도 있었다. 미국 관리들은 민중 봉기가 성공해 이라크 국가가 붕괴하고 중동의 “골칫거리” 이란의 힘이 강화될까 봐 두려워했다.

미군 고위층은 반란군 대표들과 면담을 거절했다. 그리고 후세인 정권이 휴전 협정을 어기고 반란군을 공격할 때 이를 모른 체했다. 후세인 군대가 이라크 남부 도시 케르발라 인근에서 도주하는 반란군에게 소이탄을 투하했을 때, 그 곳 상공을 순찰하던 미국 비행기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폭풍이 지나간 뒤

“사막의 폭풍” 작전의 최대 피해자는 이라크 국민들이었다. 유엔 추산으로도, 한때 그리스와 비슷한 경제 발전 수준을 자랑하던 나라가 전쟁과 경제 제재 때문에 아프리카의 말리 수준으로 전락했다. 매달 어린이 7천 명이 사망하고 1990년 이후 1백5십만 명이 죽었으며 평범한 이라크인들은 하루 권장 열량의 34퍼센트만 섭취한다. 그러나 이런 통계 수치로도 이라크의 참상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EP)의 관리는 1996년 이라크를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심각한 영양 부족에 시달리는 이라크인이 4백만 명―인구의 5분의 1―이 넘는다. 그 중에는 5세 미만 아동 2백4십만 명, 임산부·빈민 여성·무의탁 노인 약 60만 명도 포함된다. … 주민의 70퍼센트는 먹을 것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다. …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바싹 야윈 상태다.”

군사 전문가 릭 앳킨슨은 “사막의 폭풍” 작전을 요약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력] 충돌은 값싼 석유, 친미 왕정,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에 적대적인 패권 국가의 등장을 막으려는 워싱턴의 전략 목표를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