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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무기사찰단이 이라크에서 한 일

유엔 무기사찰단이 이라크에서 한 일

조박은정

● 1998년 11월 7일 15명의 무기사찰단원들은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 둔 채 이라크에서 철수했다.

● 1998년 12월 16일 남아 있던 사찰단원들도 이라크를 떠났다.

● 1998년 12월 17일 사찰단원들이 이라크를 떠난 지 몇 시간 만에 “사막의 여우” 작전이 시작됐다.

언론은 유엔 무기사찰단이 1998년 12월 이라크에서 쫓겨났다고 보도한다. 그러나 당시 리처드 버틀러가 이끈 무기사찰단이 이라크에서 철수한 것은 그 직후 벌어진 미국과 영국의 폭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유에스에이 투데이〉(1998년 12월 17일치)는 이렇게 보도했다. “러시아 대사 세르게이 라브로프는 버틀러가 유엔 안보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무기사찰단을 철수시켰다고 비난했다.” 그 이튿날 〈워싱턴 포스트〉도 “[미국과 영국의] 군사 공격을 예상한 버틀러가 화요일 밤에 단원들에게 바그다드를 떠나라고 지시했다.” 하고 보도했다.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수석 무기사찰단원이던 스콧 리터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이라크 국내 통신을 추적하기 위해 1992년부터 사찰단에 침투했다고 밝혔다.

“CIA가 개입한 사례는 분명히 많다. 그 중 많은 것은 합법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든다. 누가 명령했는가? 한 가지 일은 CIA 요원들이 포함된 팀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나는 언제나 그렇게 했다. 내가 통솔하는 모든 팀에 CIA 요원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필요했다. 그들은 훌륭했다. … 이라크 내에서 하는 모든 활동이 대량 살상 무기를 찾아 내라는 유엔의 명령을 철저하게 따르는 한, 그것은 아무 문제도 안 됐다. 유엔의 임무와 무관한 기밀 정보를 수집하는 데 사찰단을 이용하도록 허용하기 시작한 순간, 사찰 제도 전체의 신용이 떨어졌다. 몇몇 프로그램들 ― 가장 중요한 것은 1996∼1998년에 내가 기획해서 실행한 신호 정보 프로그램이다 ― 은 CIA가 사담 후세인을 염탐하려는 목적을 위해서 허용됐다.”

1999년 미국 정부는 무기사찰단을 이용해 이라크에서 정보를 수집했다고 시인했다. 〈워싱턴 포스트〉 1999년 1월 8일치는 이렇게 보도했다.

“거의 3년 동안 미국은 무기사찰단원들이 이라크에 몰래 설치한 장비를 이용해 후세인 대통령의 최측근 보안군의 암호 무전 통신을 때때로 감시해 왔다고 유엔과 미국 관리들은 말했다. 1996년과 1997년에 무기사찰단원들이 휴대한 상업용 장비가 이라크의 통신을 포착했다. 이것은 그 뒤 영국·이스라엘·미국에 있는 분석 센터들로 보내져 해독됐다. 관리들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이 정보를 이용해 이라크 정부를 뒤흔들려 했다. 그리고 CIA 요원들은 후세인을 타도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정예 수비대원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무기사찰단의 마지막 보고서는 사찰단이 철수하기 직전인 1998년 12월 15일에 전달됐다. 미국은 의도적으로 그 보고서의 내용이 매우 위험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 했다. 12월 16일치 〈워싱턴 포스트〉는 클린턴 정부 관리들이 “버틀러와 계속 대화하면서 그 보고서 문안을 완성하는 데 직접” 개입했다고 보도했다. 그 보고서는 “사막의 여우” 작전의 핑계 구실을 했다.

1998년 12월 16일 밤, 미국의 폭탄과 미사일이 이라크에 떨어졌다. 무기사찰단의 활동 덕분에 미국은 오늘날 이라크 정권에 대해서 1991년 걸프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 지도부를 보호하는 첩보·안보·운송 기관들뿐 아니라 이라크 정부 체계 역시 잘 알고 있다. 무기사찰단은 은폐된 대량 살상 무기를 찾는다며 이라크의 특수 건물과 사무실 들을 사찰해 정보를 모았다. 바로 이것이 12월 폭격의 표적 목록을 작성하는 기초가 됐다.

표적 목록을 보면, 그리고 “사막의 여우” 작전을 잘 아는 관리나 분석가 10여 명과 나눈 폭넓은 대화들을 보면, 미국과 영국의 폭격이 무기사찰단에 협력하기를 거부한 후세인에 대한 반사적 대응 이상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백 개의 표적 중 서른다섯 개는 이라크의 방공망 관련 시설이었다. 이것은 어떤 공중전에서도 필수적인 첫 단계다. 왜냐하면 이런 곳을 파괴하면 다른 군대를 위한 길을 터주고 전반적으로 사상자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열세 개의 표적만이 생화학 무기나 탄도 미사일 관련 시설이었다.

“사막의 여우” 작전의 핵심(표적 1백 개 중 49개)은 이라크 정권 자체였다. “사막의 여우”가 “사막의 폭풍”(1991년 1∼2월에 일어난 걸프 전쟁)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전자가 후세인의 측근이나 참모들과 관련된 건물들을 주로 겨냥했다는 것이다. 후세인의 생존에 필수적인 이라크 정보 기관, 바트당 조직, 안보·운송 기구 등이 바로 그런 표적이었다. 비밀 정보 기관의 문서 보관소뿐 아니라 SSO 컴퓨터 센터도 표적이 됐다. 바그다드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은 인근의 국영 라디오·TV 방송국에 대한 공격 과정에서 함께 폭격당했다.

미국 국가안보회의 내부 인사들은 무기사찰단한테서 뜻밖의 정보를 엄청나게 얻어 냈고, 이를 이용해 후세인의 내부 기구를 폭격하면 이라크 지도자를 미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미국의 고위 관리는 미국이 후세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네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우리는 네 머리 속에 들어가 있다.” 표적 목록이 없었다면 그런 말은 완전한 허장성세였을 것이다.

“사막의 여우” 작전 당시 표적 목록의 기원은 1998년 10월까지 올라간다. 당시 워싱턴의 고위 관료들이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은 군사 행동이 불가피할 뿐 아니라 실제로 뭔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합동참모본부와 미군 중부사령부는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를 “붕괴시키고 줄이기” 위한 군사 작전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기사찰단한테서 얻은 자료 덕분에 표적이 될 만한 대상들은 매우 많았다. 표적들은 일곱 가지 범주로 크게 분류됐다. 11월이 되자 계획이 나왔다. 당시 미군 중부사령관 앤서니 지니가 내린 명령을 보면, 대량 살상 무기 관련 표적 자체는 별로 없었다. 의심스런 모든 시설들 ― 이븐 알 하이탐, 카라마, 알 킨디 인 모술, 샤히야트, 타지, 자파라니야 ― 에는 이미 무기사찰단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사막의 여우” 작전 당시 생화학 무기 생산 시설로 의심되는 곳을 폭격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미국이 “부수적 피해”의 가능성 때문에 그런 표적들을 회피했다고 떠들어 대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표적을 선정한 자들이 진짜 무기 생산 시설이라고 충분히 확신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70시간의 폭격이 이라크 군대를 철저히 파괴할 수 있었고 43일 이상 수만 번의 공습으로도 얻을 수 없었던 결과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그 답은 역시 표적 목록에 있다. 그리고 훨씬 더 정확한 폭탄과 뜻밖의 표적 정보 덕분에 훨씬 더 큰 성과를 얻을 것이라는 정부의 믿음에 있다.

무기사찰단의 역사, 그들이 CIA를 위해 일하고 이스라엘과 미국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볼 때, 이라크가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기 꺼린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유엔 무기사찰단 보고서는 ww.un.org/depts/unscom/, 유엔 보고서는 www.un.org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