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중동은 전쟁 일보직전 상태다. :
억압자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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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이스라엘의 리쿠드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이 이스라엘 병사 1천 명의 호위를 받으며 이슬람 성전인 알 샤리프 사원이 있는 언덕을 방문하면서 중동의 위기가 불거졌다. 이스라엘은 아리엘 샤론의 이슬람 성전 방문에 항의하는 아랍인들에게 발포했다. 이 과정에서 12살된 팔레스타인 소년 라비자말 알두라가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이스라엘 군인들이 정조준하여 쏜 총에 맞아 숨진 장면이 전세계 TV를 통해 방영되면서 아랍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하지만 서방 지도자들과 세계 언론들은 10월 12일 라말라에서 두 명의 이스라엘 보안 경찰이 팔레스타인인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팔레스타인 폭도들이 이스라엘 병사들을 죽였다며 분노를 나타냈다.
라말라에서 발생한 이스라엘 경찰 두 명의 죽음에 이스라엘은 서안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거주지역에 폭탄을 투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라말라의 한 목격자는 그 소도시에서 있었던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스라엘은 보안 경찰이 실수로 라말라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군대가 라말라 전체를 감시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들이 어떻게 실수로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이 보안 경찰을 발견하고는 매우 분노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인 점령자들이 48세 된 한 팔레스타인 남자를 전기봉으로 지졌으며, 그의 눈까지 뽑아버린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네 대의 무장 헬리콥터가 라말라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마치 전쟁이 벌어진 것처럼 하늘에서 로켓포 소리가 들렸다. 로켓포탄 하나가 우리 옆에 떨어져 우리 집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저들[이스라엘인 점령자]이 전기동력 장치를 뽑아버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누가 폭격기와 탱크를 가졌는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돌을 지녔을 뿐이다. 우리는 정의와 인류애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가능한 모든 연대를 필요로 한다.
나불루스의 한 의과대학생인 타멘 다비는 이스라엘 군대의 폭격 뒤에 벌어진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병원의 응급실은 인명용 총탄과 포탄에 의해 머리나 가슴 또는 흉부가 박살난 어린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모하메드도 허벅지에 총을 맞았습니다. 그의 친구 두 명이 그를 앰뷸런스로 데려오다가 총에 맞았습니다. 무사라는 어린이는 턱과 혀, 머리의 우측면이 파손돼 혼수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모든 시위에 총을 쏴대고 있습니다. 점령자들은 도로를 봉쇄하고 차나 들판에서 민간인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땅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무자비한 점령군에 맞서 계속 돌을 던질 것입니다. 돌이 바닥나면 올리브 나뭇가지를 던질 것이고 그것도 바닥나면 접시나 포크를 던질 것입니다. 이조차 바닥나면 우리 몸뚱아리를 던질 것입니다.
서방 지도자들과 세계 언론들은 9월 30일부터 시작된 최근의 유혈 사태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130여 명이나 죽고 수천 명이 다친 것에 대해서는 애써 못 본 체하다가 이스라엘 보안 경찰 두 명이 죽은 것에 대해서는 왜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이스라엘 병사 두 명의 생명이 1백 수십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인가?
서방의 지도자들과 세계의 언론은 중동에서 벌어진 최악의 위기를 마치 팔레스타인인들의 잘못으로 다루거나 기껏해야 양측 모두 폭력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태에 대한 완전한 왜곡이다.
한편에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잘 무장된 강력한 이스라엘 국가와 핵무기가 있다. 이스라엘 군대는 정착촌의 무장 정착민들과 힘을 합쳐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 기관총, 로켓포, 고속 화기, 고무 총탄 그리고 최루가스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있다. 이들은 맨손이거나 기껏해야 길에서 파낸 돌멩이를 들고 이스라엘이 부당하게 자신의 땅을 점령한 것에 항의해 정의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더욱 황당한 주장은 최근의 유혈 충돌에서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이 많이 죽자 그 책임이 오히려 팔레스타인측에 있다는 것이다.
이번 유혈 사태에서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죽은 팔레스타인 희생자 중 어린이가 30%를 차지한다. 그러자 지난 10월 25일 영국의 〈더 타임스〉 지는 팔레스타인 어린이 2만 5천 명이 야세르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의 정치조직인 ‘파타’가 운영하고 있는 90여 개의 캠프에서 모의납치 등 게릴라전 훈련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이 총격으로 스러져 가는 모습에도 분개하지만 천진난만한 어린이에게 적개심을 심어 주어 전선으로 내보내는 팔레스타인측도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휴먼 워치’ 등 국제인권단체들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무고한 어린이들을 전장에 내몰아 희생을 강요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 주장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지난 52년 동안 이스라엘의 군대와 정착민들에 의해 고향에서 추방당해 난민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또, 이스라엘이 지난 1967년부터 가자지구와 서안을 점령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고문하며 학살한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소년·소녀들은 점령군의 만행과 횡포를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보아 왔기 때문에 시위에 참여하고 돌멩이를 던지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의 삶 앞에 놓인 일상적 빈곤과 불의를 끝장내고 이스라엘의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종교 분쟁?
10월 7일 팔레스타인인들이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나블루스 유대교 성지인 ‘요셉의 묘’를 파괴하자 이스라엘 바라크 총리는 48시간의 최후통첩을 전하면서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들은 최근의 중동 위기를 종교 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하는 것은 반유대인적 태도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이스라엘 국가의 성격과 반유대주의의 뿌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대다수 유대인들이 중동에 있는 모국에 항상 의존해 왔다는 말도 진실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들이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세계 각지로 흩어진 것은 예루살렘 함락(서기 70년) 훨씬 전부터였다.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의해 함락되기 전에 유대인들의 4분의 3 이상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신의 “모국”이라고 여기는 것은, 이슬람인들이 메카를 방문하듯이 종교적 순례의 형태로만 나타났을 뿐이다. 대다수 유대인들이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지 않게 된 이유는 로마의 박해라는 폭력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지리적 조건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척박한 대부분 지역에서 살지 못한 대다수 유대인들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촌락 공동체 사이에서 물건을 중개하는 상업에 종사하면서 살아 왔다.
유대인을 위한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인 시온주의는 19세기 말 유럽에 있던 유대인 공동체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 운동은 경제 위기에 대한 속죄양으로 유대인들을 공격했던 러시아의 짜르나 독일의 비스마르크 같은 지배자들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유대인들의 대응이었다. 그래서 시온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감을 반영해, 유대인과 비유대인들이 함께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포함하게 됐다.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했고, 또 이것은 구약 성서에 명기된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시온주의를 해결책으로 여긴 유대인들은 단지 소수였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비유대인들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지지했다. 그들은 반유대주의를 없애는 길은 유대인 노동자와 비유대인 노동자 모두를 착취하는 자본가들에 대항해 비유대인 노동자들과 단결된 투쟁을 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좌파 유대인 단체들은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러시아의 분트 조직은 1903년에 4만 명의 지지자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운동의 지도자였던 트로츠키, 카메녜프, 지노비예프 등이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독일 사민당 내에서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 칼 카우츠키 등이 유대인들이었다. 이 당시 사회주의 단체에 속해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유대인 국가 건설에 반대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어느 누구도 반시온주의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똑같은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유혈낭자한 학살을 피해 도망쳤을 때도 팔레스타인 지역은 인기 있는 곳이 아니었다. 1880년에서 1929년 사이에 유럽을 빠져나왔던 유대인들은 거의 4백만 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서 거의 3백만 명은 미국으로 향했다. 단지 12만 명만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했다.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 홀러코스트라는 히틀러의 끔찍한 유대인 살륙이 진행됐던 때 나찌는 6백만 명의 유대인을 절멸시켰다. 바로 이 때부터 시온주의가 유대인들 사이에서 주류가 됐다.
미국이 이스라엘 국가를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하도록 후원했을 때조차 많은 유대인들은 유럽에서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가는 것을 썩 내켜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미국으로 향했다. 1948년 데이르 야신 마을에서 시온주의자들이 350여 명의 마을 주민을 학살한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일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을 통해 유럽의 피억압자에서 중동의 억압자로 변모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반유대주의는 유럽에 한정된 현상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대다수 아랍인들과 평화롭게 살았던 아랍 나라들에서는 반유대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1920년과 1921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유대인들을 처음 공격했다. 그것은 당시 중동을 식민지로 갖고 있던 영국이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하도록 보장한 것 때문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하나의 섬처럼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경화했다.
오늘날 아리엘 샤론 같은 전범이 이스라엘에서는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학대하고 억압하는 것이나 미국의 이해관계를 지키는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 이스라엘인들도 많이 있다.
전범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수상 에후드 바라크는 우익 야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과 비상 거국내각을 구성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모욕이며, 이스라엘이 평화를 애호한다는 주장이 온전한 위선임을 보여 준다.
이번 분쟁의 불씨를 던졌던 샤론은 아랍인들을 대량 학살한 자일 뿐 아니라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의 피를 손에 묻힌 전범자다.
1953년 그는 악명 높은 101특공대를 만들어 인근 아랍 지역 국가들을 침공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살륙했다. 샤론은 1967년 전쟁 이후 시나이 사막 점령 작전의 이스라엘군 지휘관이었다. 한 목격자에 의하면 샤론의 군대는 1만 명의 농민과 베두인 족을 쓸어 냈으며, 그들의 집을 불도저로 밀어 버리거나 폭파했고, 그들을 텐트에서 끌어내고 농작물을 파괴하고 우물을 메워 버렸다.
그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도 책임이 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를 공습해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병원, 학교, 유치원 등 민간 시설을 폭격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전역에 걸쳐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파괴하고 불도저로 밀어 버리거나 폭파했다. 이스라엘은 적어도 1만 9천 명을 살해했는데, 그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1982년 9월 샤론의 이스라엘 군대는 사브라와 샤틸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수용소를 포위했다. 그는 우익 레바논 결사대를 캠프 안으로 보냈다. 이 결사대는 2천7백 명의 남녀와 어린이를 몇 시간 안에 살륙했다. 결사대 중 한 명은 임신한 여성을 난도질하면서 ‘살려두면 테러리스트를 낳을 것’이라며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했다. 샤론의 전력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학살로 점철돼 있다.
1980년대 초에 샤론은 1967년 이후 서안과 가자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을 가장 크게 확대하는 명령을 내린 것 때문에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2년에 이스라엘 군사법정은 샤론이 이스라엘 병사들에게 서안의 아랍 학교 어린이들을 구타하도록 사주했다는 기소를 심리하기도 했다. 바로 2년 전에도 샤론은 가자, 라말라, 나불루스의 팔레스타인 마을 시위자들에 대해 미국의 아파치 전투용 헬기를 사용하자는 안을 추진했다.
대규모 도적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충돌의 뿌리는 1948년의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있다. 나찌의 홀러코스트가 있기 전에만 해도 시온주의자로 불리는 극소수 사람들만이 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하면서 “유대인 국가”라는 사상을 지지했다. 시온주의는 유대인이라는 인종적 기반에 바탕을 둔 국가의 건설을 핵심적으로 주장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땅 없는 민족”에게 마치 “민족 없는 땅”처럼 비쳐졌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은 “민족 없는 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될 당시만 해도 10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여러 세기 동안 그 땅에서 일하면서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 국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음으로써 건설될 수 있었다.
1947년 유엔의 이스라엘 국가 건설 계획안은 팔레스타인 땅의 55%를 유대인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그 지역의 땅을 단지 6%만 소유하고 있었다. 1948년 유엔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할안을 통과시켰을 때 시온주의 정착민들은 55%의 땅조차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늘날이라면 “인종 청소”라고 불릴 수 있는 야만적인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고향에서 쫓아냈다.
시온주의 테러단인 이르군이 저지른 1948년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을 목격한 한 국제적십자 소속원은 학살이 끝난 뒤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신음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사방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조그마한 발 하나를 발견했다. 아직 따뜻했다. 그것은 수류탄에 의해 절단된 한 소녀의 발이었다. 그 소녀는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끔찍한 장면들뿐이었다. 이 마을에는 약 4백 명이 살고 있었다. 약 50명은 도망쳤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 살인 집단은 훈련을 받았고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
이스라엘은 데이르 야신에서 벌어진 일을 이용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협해, 그들을 고향에서 추방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추방된 마을 가운데는 하이파와 야파 같은 대도시도 포함돼 있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416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을 파괴했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의 모든 땅과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하여 1948년 5월에 이스라엘은 비옥한 농업용지의 95%를 포함해 팔레스타인 땅의 80%를 장악했다. 약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추방당했다. 46만 명은 이웃 나라인 요르단으로 피신했고, 20만 명은 가자지구로, 10만 명은 레바논으로, 8만 5천 명은 시리아로 도피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난민촌에서 극도의 빈곤 속에 살아야 했다.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을 통해 서안과 가자지구를 장악했을 때 또다시 2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쫓겨났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이 귀환법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 군대와 정착민들에 의해 추방된 무려 350만 명의 아랍인들이 여전히 난민촌에서 살고 있다.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들을 체계적으로 약탈했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서안에서 이스라엘 농장과 읍내로 물을 보냄으로써 아랍의 농촌 지역사회를 황폐화시켰다.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군대의 지지를 받아서 아랍인들이 자기 땅에서 도망갈 때까지 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한 정착민은 이렇게 시인했다. “우리는 마을에 가서 창문에다 약간의 총격을 가해 마을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고 정착촌으로 돌아왔다. 돌멩이를 던지는 소년을 잡아 데려와서 흠씬 두들긴 다음 그를 군인들에게 넘겨줘 죽이도록 했다.”
1967년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국기를 금지시키고 팔레스타인인들의 단체를 모두 불법화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가 난민촌과 마을을 순찰하면서 아랍인들의 저항을 분쇄했다. 점령지를 통제하려는 이스라엘의 시도는 1982년 레바논 침공으로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유엔의 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남부 레바논의 접경 지역 15km의 “안전지대”를 올해까지 장악했다.
난민촌―빈곤과 절망의 악몽
이스라엘 국가가 창설된 뒤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엄청난 빈곤과 박해로 고통을 겪었다. 약 12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지역에서 쫓겨나 서안과 가자지구의 난민촌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삶이란 오로지 빈곤과 절망뿐이다. 어린이들은 이 비참한 난민촌에서 태어나 죽었다. 움막과 텐트에는 위생 시설이 전혀 돼 있지 않다. 이들은 난민촌이 소재한 나라의 원조를 통해서만 음식과 옷가지들을 얻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있는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거나 통과하려는 모든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도시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아랍 노동자들이 이스라엘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부정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있다. 이스라엘 회사들은 몇 세대에 걸쳐 팔레스타인인들을 값싼 노동력으로서 착취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 조건은 1993년 평화 협상 과정이 시작된 이후로 더 열악해졌다. 실업률이 일부 지역에서는 40%에 달했다.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 일인당 연평균소득이 1987년의 288만 원에서 173만 원으로 하락했다. 지금 이스라엘의 일인당 연평균소득은 1980만 원이다.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가장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군대는 공식적으로 고문을 허용하며 고문이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점령에 저항하는 평범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러한 탄압이 일상적으로 가해지고 있다.
석유―중동에서 미국이 바라는 것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평화 회담을 추진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 회담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정의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는 그대로 남아 있다. 팔레스타인이 서안과 가자지구의 일부 지역에 대한 제한적인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수백만 팔레스타인 피난민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으면서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이 추진하는 평화회담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다. 최근 이스라엘 군대의 잔혹한 만행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이 높은 것 때문에 유엔 인권위가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채택하려 했을 때 미국과 영국은 반대표를 던졌다.
1993년의 오슬로 평화회담은 1987년에 시작된 ‘인티파다’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의 탱크가 아랍인 자동차를 파괴하고 승객들을 죽였다. 1만 명이 모인 장례식이 시위로 변했다. 이스라엘 군대는 또 다른 시위에서 20세 청년을 죽였다.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그 뒤 2년 동안 점령지에서 지속된, 이스라엘 지배에 반대하는 대규모 항의가 시작됐다.
이 투쟁 때문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와 협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소국가를 창설하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협정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소국가가 창설되고, 그 수장으로 야세르 아라파트를 옹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국가는 너무나 적은 권한만을 갖고 있다. 이 소국가는 서안의 17.2%만을 온전히 통제할 뿐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서안의 59%와 가자지구의 3분의 1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
또, 오슬로 협정은 1998년에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울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방 열강과 이스라엘이 야세르 아라파트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분개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기만 때문에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인 하마스 같은 더욱 전투적인 집단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중동에서 미국의 진정한 관심사는 석유 다국적기업을 위해 원유의 원활한 공급과 유통을 보장하는 것이다. 미국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정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 석유를 지키는 경비견인 이스라엘만을 지원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은 이러한 이익을 지키기 위해 걸프 국가들을 순찰하는 구축함을 갖고 있다. 미국의 구축함 중 하나인 USS 콜 호가 예멘의 아덴 항에 정박하고 있다가 자살 폭탄 테러의 대상이 돼 17명의 미군 승무원이 죽었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 지역의 거대 유전을 지배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이용했다. 이스라엘은 탄생할 때부터 미국의 경비견 역할을 타고난 셈이다. 이스라엘의 영향력 있는 신문 〈하아레츠〉 지는 1951년에 이렇게 썼다. “이스라엘은 경비견이 돼야 한다. 만일 때때로 서방 열강이 어떤 이유에서든 눈감아 주고자 한다면 서방 국가들에 불손한 이웃 아랍 국가들을 응징하는 것을 이스라엘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시장 장악과 무기를 놓고 소련과 경쟁이 치열해지자 중동을 자신의 동맹자로 삼고자 했다. 미국은 아랍 국가들을 하수인으로 삼는 일을 추진하는 한편, 빈곤한 아랍 대중과 극도로 부유한 지배자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에 대해 염려했다.
결국 미국은 1950년대 아랍 세계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이 거대하게 성장하자 이스라엘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스라엘은 그 때 이후로 중동에서 미국의 경비견 노릇을 했다. 이스라엘은 미국 덕분에 경제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고 아랍 국가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미국으로부터 해마다 거액의 군비를 지원받아 왔다. 미국은 1967년 전쟁 이후 4년 동안 15억 달러어치의 무기를 이스라엘에게 제공했다. 또, 미국은 1974년 이후로 80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1984년 이스라엘 경제가 붕괴 일보직전이었을 때 레이건 대통령은 15억 달러의 긴급 원조 계획을 승인했으며, 긴급 원조 외에도 30억 달러를 원조해 주었다.
미국의 이스라엘 원조는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올해에만 미국으로부터 41억 2천9백만 달러를 받을 것이다. 이 가운데 31억 2천만 달러는 군사비로 들어갈 것이며, 9억 4천9백만 달러는 경제 원조로 사용될 것이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올해 미국으로부터 고작해야 1억 달러를 받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총리인 바라크는 작년에 “워싱턴에 있는 우리 친구는 이스라엘에 대한 원조가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중동에서 평화는 가능한가?
중동에서 평화는 가능하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전에는 함께 살았으며 앞으로도 함께 살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첫번째 일은 강력한 이스라엘에, 그리고 미국 같은 제국주의 열강에 반대하는 아랍인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두번째는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민주적이고 세속적인(비종교적인) 유대인·아랍인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것이다. 중동 민중에게 항구적인 평화와 평등은 낡은 정권들을 모두 타도하고, 수백만 대중에게 빈곤만을 가져다 주는 소수의 풍요를 끝장내는 데 있다. 이런 일은 아랍 지역의 인구에서 비록 소수일지라도 노동계급이 지도하는 투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