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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60주년:
그들만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탄생했나?

뉴라이트와 이명박 정부가 ‘건국 6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되살리겠다며 친일·독재 세력의 역사관을 복권시키려 한다.

우익들은 남북한 체제 경쟁(주로 경제적인 면에서)에서 남한이 승리했으니 ‘건국세력’의 분단 정부 선택은 올바랐다고 합리화한다. 그리고 남한이 승리한 이유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익들이 ‘북한이 좋아? 남한이 좋아?’ 하는 식으로 철 지난 냉전 논리를 들이대는 이유는 뻔하다. 이를 통해 ‘건국 60년’ 동안 재벌과 강부자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온 체제와 권력을 옹호하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건국 60주년’ 운운하는 집권세력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고, 시장 중심 경제 논리는 경제 위기 속에 심각한 양극화와 서민 고통을 낳고 있다. 이런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인 체제와 권력이 탄생하는 과정은 매우 추악했다.

분단 정권 수립

1945년 8월 15일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당시 조선인들이 해방의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기도 전에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우익들은 1945년부터 소련이 먼저 북한에 단독 정부를 성립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단독 정부 수립은 남북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박명림 교수는 “미군정의 국가기구 창설 노력은 1945년에 이미 그 초기적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소련은 김일성을, 미국은 이승만을 자신의 꼭두각시 정부를 이끌 지도자로 선택했다. 미국은 마치 이라크 국내에 아무런 기반이 없는 망명객 알라위를 이라크 침략 직후 꼭두각시 정부 수반에 앉힌 것처럼 이승만을 군용기에 실어 남한으로 공수했다.

우익은 단독 정부 수립을 두고 “민주공화국의 탄생” 운운하지만,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과정은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남한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아래로부터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 요구를 분쇄한 뒤 성립했다.

해방과 동시에 수많은 곳에서 인민위원회와 같은 자치 기구들이 생겼다. 대체로 인민위원회는 친일과 거리를 둔 신망있는 지역 유지들이나 노동·농민·학생 단체들의 연합이 주도했다.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들이 도망간 작업장에서 자주관리 운동을 벌였다. 수많은 공장, 언론사, 학교, 광산, 교통 시설이 노동자들의 민주적 통제에 놓였다. 이 운동은 박흥식 같은 친일 조선인 사업가들 소유의 작업장까지 확산됐다.

미군정과 친일파들은 이런 아래로부터 민주주의적 근대화 가능성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 탄압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저항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봉기로 절정에 올랐지만 미군정과 우익은 시위자 1천여 명을 학살하면서 진압했다.

1948년 5월 10일 분단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은 매우 살벌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단독 정부 수립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좌파는 부분적인 무장투쟁을 벌였고, 중도파와 김구 계열의 우파 민족주의자들까지 선거 참여 거부를 선언했다.(이 때문에 뉴라이트 이인호는 김구마저 ‘대한민국체제 부정세력’이라고 분류한다.)

이승만은 제주도에서 벌어진 분단 정부 수립 반대 항쟁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대략 2만~3만 5천 명의 제주도민들이 온갖 잔악한 방법으로 살해됐다.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 항쟁 진압을 거부한 군인들의 반란도 대량 학살로 진압됐다.

5월 10일 총선에서 경찰과 우익은 공공연한 위협으로 이승만 지지를 강요했다. 그러나 분단이 기정사실화됐다는 체념과 낙담 속에서도 반(反)이승만 정서는 강했다. 이승만 세력도 한민당도 아닌, 무소속 후보들에 대한 지지율이 40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이런 분단 정권 수립은 결국 한국전쟁의 재앙을 불렀다. 우익은 한국전쟁의 책임에서 이승만을 면죄시키려 하지만, 전쟁의 책임은 김일성과 이승만 양쪽 모두에게 있다.

이미 1949년부터 38선 상에서는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빈번했다. 서로 으르렁대던 두 사냥개를 잡아둔 줄을 먼저 놓은 쪽은 스탈린이었지만 이승만의 북진통일론도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다. 1949년 초반까지만 해도 남한군은 병력과 무기 면에서 북한군보다 우월했다. 비록 남한의 북침은 미국의 승인이 없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수많은 미·소의 자료들은 [1949년] 7월 남한의 공격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었다. (정병준, 〈1949~1950년 38선 충돌과 북한의 한국전쟁 계획〉)

이런 남북의 군사적 적대는 한반도가 소련과 미국의 제국주의 패권 시험을 위한 전쟁터로 이용되는 데 한몫 했다. 이 전쟁으로 무고한 남북한 민중 수백만 명이 희생됐다.

※ 필자는 ‘다함께’가 주최하는 ‘맑시즘2008’에서 ‘해방부터 남한정부 수립까지’라는 주제로 연설한다. (8월 15일(금) 오후 2시 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