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북ㆍ대미 정책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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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내 반미 감정의 배경
대통령 후보 노무현이 내건 공약 가운데 당선에 크게 공헌한 것이 “대북 화해·협력 정책 계승”과 “수평적 한미 관계 수립”이라고들 말한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통치자들이 분단을 이용해 억압을 휘두르는 일이 다시 없기를 국민 다수가 바란다는 뜻이다.
53년 전 참혹한 전쟁을 겪었고, 여전히 냉전이 만들어 놓은 대립 구도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평화 염원은 각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또, 미국이 한국 사람들에게, 한반도 평화에 과연 도움이 되는 세력이냐는 의문이 지난 몇 년 동안 커져 왔다.
미국의 오만함은 어린 두 소녀를 탱크로 짓이겨 놓고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던 데서 처음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반미” 분위기의 기원은 군사독재 정권 지원 문제는 제쳐 놓고라도 적어도 몇 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부시 정부는 미국의 압도적 군사 우위를 이용해 일방주의를 강화했고, 이를 위해 9·11 테러를 이용했다.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면서 한반도에도 긴장이 한층 강화됐다.
〈시사저널〉이 2002년에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2%가 부시의 대북한 정책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1989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전 세계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을 막지 않으면 전 세계가 전쟁과 야만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퍼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한국에만 유독 생겨난 게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일방적인 이라크 전쟁 몰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유례 없이 빠르게 성장했다. 세계적으로 보자면, 한국의 “반미” 시위는 오히려 뒤늦게 대열에 합류한 셈이었다.
1997년 IMF 경험으로 상징되는 미국식 시장 경제 도입의 강요도 “반미”의 밑거름이 됐다. 미국이 강요한 정책 탓에 많은 사람들이 사회 복지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직장에서 쫓겨나고, 노동 조건이 악화되고, 빈부 격차가 커졌다.
노무현은 반미인가?
노무현의 대북 정책과 대미 정책에 대한 기대감은 그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심지어는 그가 말한 것보다 훨씬 부풀려져 있다.
부분적으로 미국 공화당 우익과 한나라당과 〈조·중·동〉 일보가 노무현에 대해 우익적 공격을 해대는 것과 노무현에 대한 기대를 부추기는 다른 언론들이 이를 교묘히 이용하는 것이 합쳐져 부풀리기 효과를 내 왔다.
우익의 공격에 빌미를 줄까 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노무현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정작 노무현은 한미 관계와 관련해 자기에게 덧씌워진 급진적 이미지는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시간 있을 때마다 강조하곤 한다. 인수위 시절, 그가 가장 중요한 대미 관계의 과제로 삼았던 것은 자신에 대한 오해 풀기였다.
“10년 전에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한 바 있지만, 오래 전에 그 같은 입장을 버렸다.”(후보 시절)
“한미 동맹 관계는 과거에도 소중했고, 현재도 소중하며, 미래에도 중요할 것이다.”(2003년 1월 13일 미국 국무부 차관보 제임스 켈리와 만나)
“나는 좌파가 아니다. … 한국민은 미국에 감사하며 주한미군 주둔을 바란다.”(2003년 2월 20일 헤리티지 재단 세미나에 참석해)
“우리 국민은 미국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한다.”(취임식에 온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을 만나)
그가 말하는 “평등하고 수평적인 한미관계”는 “미·일 등 전통적 우방과의 협력 강화”(노무현 후보 공약)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 그 자체의 변화를 뜻하는 게 아니다.
물론 미국에게는 이런 표현조차 거슬릴 게 뻔하다. ‘까라면 까’ 왔던 한국이 감히 미국과의 “평등”이니 “수평”이니 하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노무현이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용산 미군 기지 이전, SOFA 개정, 전시 작전권 환수는 (쟁점마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 중간계급 속에서는 물론 심지어 지배계급 일각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는 목소리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새로운 문제들이 아니라 이미 지난 10여 년 동안 꾸준히 제기돼 온 문제들로서 한국 사회의 변모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른바 ‘친미’하면서도 ‘자주’적이고 싶다는 것인데, 노무현이 대변하는 주장은 이것 이상이 아니다.
예컨대, 미국은 용산 미군 기지를 1996년까지 한국에 반납하기로 이미 1990년에 합의했다. 미국은 이전 비용 문제를 들먹이며 약속을 지금껏 미뤄 왔다.
이 문제에 관해 노무현이 한 일이라곤 이전 비용을 대겠다고 오히려 미국측에 유리한 공약을 한 것뿐이다. 하지만 50년 동안이나 다른 나라 수도에 주둔했던 미군이 이전하는 데 왜 우리가 돈을 내야 하는가?
SOFA는 1991년과 2000년에 두 차례 개정됐다. 불평등 조항의 개정을 처음 요구한 것은 노태우 정권이었고, 미군이 SOFA 개정 협상에 응하게 한 동력은 1980년대말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가지고 있었던 작전통제권 가운데 평시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이 회수한 것은 지난 1994년 12월 1일이었다. 그 뒤 전시 작전통제권도 한국군이 가져야 한다는 얘기가 논의돼 왔다.
미국이 진정 걱정하는 것은 노무현의 정체가 아니라 한국인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미국 정부에 대한 반감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한국을 방문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한국을 방문한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한국민 사이에 퍼져 있는 반미 감정을 시찰하는 것임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은 아래로부터의 저항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온순한 동맹 세력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한다.
미국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대통령?
노무현은 “전쟁은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혀 왔다. 그는 한국노총과의 간담회에서 “언론이 미국과 [내가] 다르다고 하는데 안 다르면 결과적으로 전쟁을 감수하자는 것이냐” 하고 말했다.
하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그의 정책은 그 동안 한반도 평화 정착을 가로막거나 위협해 왔던 요소들을 동시에 담고 있는 모순 투성이이다. 세 가지 예만 들고자 한다.
첫째, 노무현은 미국 주도의 MD(미사일 방어) 체제 참여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일관할 뿐 “NO”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MD는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삼고 있다. 미국이 MD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계속 위협적 존재로 부풀려야 하며 그러는 동안 한반도 긴장은 완화될 수 없다.
둘째, 노무현은 2002년 6월 서해교전 이후 채택된 ‘선제공격’ 교전규칙을 재개정하는 데 반대한다. 선제공격 방침을 유지하겠다고 한다.
지난 2월 20일에 북한 미그기가 북방한계선(NLL)을 몇 분간 넘었다 돌아갔다. 지금처럼 북미 관계가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북방한계선(NLL) 주변 해역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럴 때 남한측이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위험 천만한 상황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셋째, 노무현은 전쟁에 반대한다면서도 “강한 군대, 튼튼한 안보”를 내세우며 특히 한미 연합안보체제를 강조한다. 지난해 한미 연례안보회의와 합참회의는 작전계획 5027을 개악해 미국의 북폭을 염두한 한반도 전쟁 계획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올 3월에도 한미 연합 전쟁 연습이 한달 가까이 치러질 예정이다.
이런 전쟁 연습은 늘 북한을 자극해 군비를 증강하게 만들어 왔다. 나는 군사력을 증강할 테니 너는 군사력을 포기하라는 식의 이중적 태도는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할 수 없다.
한반도는 이미 세계적으로 군비 경쟁이 치열한 지역이고 남한은 그 당사자 가운데 하나인데, 노무현은 이 노선을 그대로 밟으려 한다.
이밖에도, 국방백서에 북한을 계속 “주적”으로 표현하기로 하고, 이라크 전쟁 지원 문제도 반대하지 않는 등 그의 정책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국제적 시각이 필요하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김대중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두 해 뒤인 2002년 전례 없는 규모의 전투가 서해에서 벌어졌다. 그 뒤 잠깐 동안의 잠잠함은 그 해 10월 제임스 켈리의 평양 방문으로 깨지고 한반도는 다시 전쟁 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위기는 단순히 남북 관계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는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위기를 부추기고 그 위기를 관리하는 능력을 보여 줌으로써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려 한다. 그것은 미국 세계 전략의 일부이다.
지금 미국은 북한을 계속 윽박지르고 사태를 끌면서 사실은 이라크에 골몰하고 있다. 미국이 여기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다면 한반도 문제에서 더한층의 공격성을 드러낼 수 있다.
노무현은 앞서 지적한 모순 때문에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킬 능력이 없다. 설사 노무현이 미국을 거스를 의지가 확고하다 해도 강대국 간의 세계 질서 속에서 힘을 발휘할 여지가 적을 것이다.
하물며 여전한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라크 전쟁 지원을 반대하지도 않는 그에게 한반도 평화 정착을 기대하는 것은 무망하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희망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질서에 반대하는 운동, 사람보다 이윤을 앞세워 세계를 가난과 전쟁으로 몰아 넣는 체제 자체에 반대하는 운동 속에 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지금 전 세계에서 부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