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경험은 단호한 점거 파업이 대량해고를 막았다는 사실과 협상을 하며 양보를 하다가는 투쟁할 기회만 놓칠 뿐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1998년 현대차 노조 지도부는 고용을 보장받기 위해 임금 삭감, 복지 축소 등이 포함된 양보안을 내놓고 희망퇴직까지 수용했지만 사측은 끝내 5천 명에게 해고의 칼날을 들이댔다. 사측은 현대차 노동자들이 무기한 점거 파업에 들어가고, 사회 전체의 이목이 집중되자 물러서기 시작했다. 정부도 부랴부랴 협상단을 파견했다. 노동자들의 단호한 파업에 정부는 경찰력을 투입할 수 없었고 결국 사측은 대량해고를 포기했다. 현대차 노조 지도부가 일부 정리해고를 인정하며 파업을 끝낸 것은 아쉽지만 36일간의 현대차 투쟁은 점거 파업이야말로 가장 효과적 전술임을 보여 줬다.
1998년 한라그룹의 부도로 발생한 1천1백44명의 대량해고를 막아낸 만도기계 노동자들의 투쟁도 갈 길을 보여 준다. 노동자들은 해고 방침 발표와 동시에 무기한 점거 파업에 돌입했다. 25일 간의 파업 투쟁에 조합원 95퍼센트가 참가했다. 정부는 1만 명이 넘는 경찰력을 투입해 노동자 2천7백여 명을 연행하고 42명을 구속하고서야 가까스로 파업을 파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사측이 한 발 물러나 1백5명의 정리해고 명단을 통보했으나, 노동자들은 끝까지 정리해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해고 대상자들은 무급 휴직으로 전환돼 이듬해 복직했다.
반면, 2001년 대우차 노조는 양보를 거듭하면서 투쟁의 기회를 놓친 사례다. 대우차 노조 지도부는 1999년 말 자금지원을 빌미로 사측이 요구한 ‘워크아웃 동의서’와 2000년 말 김대중 정부가 강요한 ‘구조조정 동의서’를 작성해 줬다. 그러나 사측은 1천7백54명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노조 지도부의 거듭된 후퇴로 대우차 노동자들의 투지는 사라져갔다. 노동자들이 뒤늦게 파업을 시작하자 대우차 사측은 휴업을 단행하고 경찰을 공장 안으로 불러들였다.
더구나 사측은 노동자들이 주요 공장 시설을 점거할까 봐 치밀하게 대비를 해 둔 상태였다. 해고 명단까지 발표된 상황에서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노동자들은 파업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고 결국 대우차 투쟁은 패배했다.
최근 위니아만도 노동자들의 파업 경험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위니아만도 노동자들은 4월 6일 95명 정리해고 명단 통보 직후 점거 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은 해고 통보자들에게 출입금지가처분신청을 냈고, 비해고자들에게는 “생산중단이 계속되면 부도 사태를 피할 수 없다”고 협박했다. 해고자와 비해고자를 분열시킨 것이다.
결국 해고 대상에서 제외된 일부 노동자들의 이탈과 사측의 압력 속에 위니아만도 노조 지도부는 파업을 중단했고 50명의 해고를 받아들이는 잘못된 합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