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와 예술:
예술은 ‘이데올로기’인가 아니면 단순히 즐길 거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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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예술이 삶을 반영한다면, 그것은 특별한 거울을 통해서다.” 브레히트는 “모든 예술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전통적 금언을 비틀었다.
브레히트에게 그 거울은 깨진 것이었다. 깨진 거울은 이미지를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 파편화된 형태로 반사하며, 그것이 보여 주는 것만큼이나 보여 주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말은 예술 작품을 정치적으로 평가하려는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예술 작품에 대한 미학적 평가와 정치적 평가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가?
흔히 마르크스주의적 예술 비평으로 불리는 평론들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좋은 예술 작품이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작품이다.” 이런 접근 방식의 문제점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들 중 상당수가 정치적으로 우익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T 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C S 루이스를 생각해 보라.
둘째, 많은 모더니즘 작품은 정치적 해석이 쉽지 않거나 정치 자체를 거부했다.
칼 마르크스는 예술을 인간 삶의 중요한 일부로 봤다. 그는 고대 그리스 희곡에서 당대의 소설까지 다양한 문학 작품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브뤼셀에서 결성한 독일 노동자 모임은 매주 예술 관련 토론을 했다. 마르크스는 열렬한 연극 팬이기도 했다.
또,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 (형편없는) 시를 쓰고 소설을 끄적거렸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들을 “예술적 총체”로 불렀고, 문체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다. 마르크스는 예술 작품의 호소력이 단지 철학적·윤리적·정치적 수준만이 아니라, 감수성에도 달려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와 그의 동료 프리드리히 엥겔스 모두 예술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 예술 비평은 예술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런저런 주장을 반복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래서 지난 1백년이 넘게 마르크스주의 예술 비평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해야
문제는 이른바 마르크스주의 비평으로 불리는 것 중 상당수가 작품에 숨겨진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밝혀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는 단순히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예술을 오직 이데올로기로만 바라보면 금세 모순에 봉착한다. 하지만 동시에 문화는 중립적이지 않다. 문화는 사회 바깥에 존재하는 섬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예술 비평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중 하나는 예술 작품 자체는 뒷전에 두고 그것의 역사적·사회적 맥락만 강조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도전해야 할 과제가 있다.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 비평이라면 예술 작품 생산의 물적 조건, 작품과 사회의 관계를 탐구할 뿐 아니라 예술을 하나의 작품으로 감상해야 한다.
예컨대, 세계관의 변화를 초래할 만큼 혁신적인 작품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보자.
마르크스주의 비평이라면 조이스 작품이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고통을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렸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동시에 조이스가 아일랜드인이란 점, 아일랜드의 식민지 경험, 제1차세계대전의 참상, 근대성의 문제 등을 고려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의 과제는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보다는 이데올로기와 정치, 또는 이데올로기와 법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명쾌하다.
문학에 대한 조야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모든 예술을 예술의 형식을 취한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이다. 정반대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예술이 이데올로기를 부정한다고 주장한다.
이 중 어떤 입장도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복잡한 관계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비평은 어떤 방식으로든 두 입장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예술 작품을 한편으로는 예술도 일부인 이데올로기적 구조로서 봐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 작품으로서 독자성을 가지는 것으로 봐야 한다.
다시 말해서,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비평은 예술 작품을 이데올로기와 연관시키는 동시에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둬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