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택 칼럼:
김보슬 PD를 생각하며
〈노동자 연대〉 구독
유난히 하객들이 많았다. 언론계와 시민단체 관계자들에 기자들, 심지어 검찰 수사관들까지 여기저기 눈에 띈다. 하지만 체포되기 직전 겨우 골랐다는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저간의 모든 일을 잊은 듯 쾌활한 모습이다. 출국금지를 당해 강릉으로 허니문 여행을 떠나야 하고, 언제 다시 체포될지 모르는 불안 앞에서도 마냥 의연하다.
‘광우병’PD 김보슬.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대책없이 당돌한 사람이다. 지난해 초 미국 출장을 며칠 앞두고 생면부지의 내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 그녀의 첫 마디는 “선배님! 준비 많이 못했지만 부딪히며 해낼 거예요. 무조건 도와주세요.” 그 느닷없음에 잠시 당혹해 하던 나는 통화가 길어질수록 점점 그녀의 진정성과 당찬 용기에 반하기 시작했고, 어느덧 이것저것 보따리를 풀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길 거부한 죄
돌이켜 보면 그녀의 용기와 〈PD수첩〉의 기풍이 문제였다. 필자가 광우병 문제를 제기한 2006년 10월 이후 한국 방송계에선 누구도 그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려 하지 않았다. 정권은 극도로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계속했고, 미국과 한국의 관료들은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온갖 거짓정보들을 양산해 댔다.
조중동 족벌신문들은 미국 육류수출협회의 전면광고를 실어대면서 “광우병은 수년 내로 사라질 것” “국제수역사무국 기준은 강행기준이라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그들의 거짓말을 확산하기에 골몰했다. 한국 언론의 취재에 대한 미국 현지의 블로킹도 한층 강화된 상태. 더구나 막가파 정권이 들어선 상황에서 그 모든 것을 뚫고 다시 진실을 말하려 했으니... 그 때 이후로 그녀와 〈PD수첩〉에 닥쳐온 역경은 분명 진실에 대한 사명감과 용기가 낳은 업보다.
오역논란 등 소소한 실수가 진정 문제였고 그래서 여론이 호도됐다면, 조중동이 저지른 그 무수한 오보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조치도 없는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일삼았던 농림부, 외통부 관료들은 어찌 버젓하게 승진가도를 달리는가? 그들이야말로 진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호도한 범죄자들임에도.
이명박 정권의 역린을 거스르고 지배권력의 가이드라인을 거부하는 용기를 가진 것,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타락하기를 거부한 것, 적당히 눈감고 권력을 편들어 편하게 살기를 거부한 점을 빼놓고 이 전도된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MBC, 너마저 무릎을 꿇는다면 …
하루가 다르게 방송현장의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이미 사원행동 멤버들을 보복징계하거나 한직으로 격리시킨 KBS에선 지금 엑소더스가 한창이다. 휴직계를 내고 자비로 유학을 떠나거나, 자청해서 일선부서를 떠나 눈물을 머금고 후일을 기약하는 실력파들이 줄을 잇고 있다.
가장 구매력있는 20~30대가 즐겨 보는 MBC의 광고는 ‘보이지 않는 손’의 힘에 의해 판매부진의 늪을 헤멘다. 노종면 위원장을 구속했다 풀어 준 이후 틈새를 파고들어 YTN노조의 투쟁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공작도 집요하게 진행 중이다. 매년 수백억 원을 지원해 주겠다는 미끼로 모 통신사를 회유하는 공작도 한창이라 들린다. 족벌신문과 재벌에게 방송면허를 준다는 예정된 결론을 향해 미디어위원회는 오늘도 파행 중이다.
채찍과 당근을 총동원하는 방송구도재편 음모. 그 칼날의 끝은 이미 신경민 앵커를 베고 마침내는 김보슬과 이춘근, 〈PD수첩〉 그리고 MBC를 향해 겨누어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한국 사회의 모든 방송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자본독재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진실을 가리고, 억압을 가리고 가십이나 보여 주는, 권력자들이 정한 범위 내에서 ‘안전이 검증된’ 인사들만 출연해 ‘안전하게’ 토론하는, ‘편안한’ 정보와 판타지들만 돌고 도는, 탁류만이 흐르는, 영악한 바보상자로 복귀할 것이다. 한국 언론에서 이미 사라진 것이 경제공황의 진실이요, 넘쳐나는 것은 낡은 신자유주의의 신기루뿐 아닌가!
다시 돌아온 오월. 지난해 촛불항쟁에 의해 늦춰졌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 부활하고 있다. 현 정권의 영구집권을 담보할 괴물이 부활하고 있다. 촛불들은 다시 그 괴물을 퇴치할 수 있을까? 김보슬 PD의 신혼을, MBC를 구해낼 수 있을까? 대답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