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이상우 기자는 우석훈의 주장을 잘못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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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서 이상우 기자의 우석훈에 관한 글 잘 읽었다. 이상우 기자는 우석훈의 제3부문(혹은 제3섹터), 혹은 사회 경제(혹은 사회적 경제) 논의에 주목했고, 이들의 확장은 실제로 우석훈이 《괴물의 탄생》에서 강조한 부문이다. 그런데 이상우 기자는 이것을 “이윤지상주의가 아니라 호혜, 연대, 증여의 원리에 기초해 운영되는 비시장 경제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우석훈 자신은 제3부문이나 사회 경제를 “비시장적 경제”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사회 경제 정의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회 경제는 시장 기제와 비시장 기제가 결합된 것으로 규정된다. 실제로 우석훈이 지목한 사례 중 상당수, 예컨대, “[스위스] 소상인연합”, “독일의 마에스트로들이 만들어내는 정밀기계와 소재산업” 같은 것들은 전혀 비시장적이지 않다. 그들은 시장, 즉, 미리 정해지지 않은 소비자에게 팔리는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유통하는 집단이다.
이것은 실천적으로 별 의미 없는 꼬투리 잡기는 아니다. 우석훈이 받아들인 제1(국가 공공부문)·2(대기업)·3부문(사회 경제)의 구분은 대기업의 이윤지상주의도 싫지만, “부패했고, 비효율적이고, 좌파에서나 우파에서나 끊임없이 의심받고 있는 국가”(《괴물의 탄생》, 107쪽)도 싫다는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유럽에서 상당수의 진보 인사들은 이런 이론에 근거해서 국가의 해체된 복지 부분을 다양한 제3부문 조직(사회적 기업, 자원 봉사 집단, NGO 등)의 활동을 통해 메꾸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의도는 선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것은 복지 시장화의 한 단계로 악용되기도 한다. 이들도 지속적 운영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수익을 내야하고, 작은 제3부문 조직들이 시장의 법칙을 바꿀 수도 없다. 따라서 당면해서는 시장 논리에 좌우되지 않는 복지의 유지·확대를 국가에게 요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석훈이 한국에서 복지 국가 성립에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3부문 논의가 이것과 과연 잘 조화를 이룰지는 의심스럽다.
이상우 기자의 글이 좀더 설득력이 있으려면 이상우 기자가 참여계획경제(즉,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에 비춰 우석훈을 비판하는 것과 함께, 대기업뿐 아니라 국가 공공부문의 대안으로 비시장적이지 않은 것을 가정하는 이론을 받아들인 우석훈의 주장들을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상우 기자의 글에서 또 다른 문제는 공정무역에 관한 논의다. 이상우 기자의 글에서 공정무역 부분이 차지한 분량을 보면, 이것이 우석훈 사상의 핵심 중 하나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우석훈은 《괴물의 탄생》에서 공정무역을 딱 한 번 지나가면서 언급했을 뿐이다. 또, 그의 강연을 취재한 기사들을 봐도 그가 공정무역을 강조했다는 언급은 전혀 볼 수가 없다.
더구나, 우석훈 씨가 슬쩍 언급한 공정무역도 이상우 기자가 논평한, 민간 단체가 제3세계 생산자에서 ‘공정한’ 값으로 사들인 물건을 선진국의 ‘윤리적’ 소비자들에게 파는 ‘공정무역 네트워크’는 아니었다. 사실, 공정무역은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스티글리츠는 제3세계 발전에 필요한, ‘공정한’ 국가 간 무역 체제의 의미로 사용한다. 반면에 미국 민주당과 일부 미국 노조 관료들에게는 미국 같은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수단이다. 공정무역 네트워크 논의에서도 옥스팜은 현존 무역체제를 보충하는 의미로 쓰지만, 어떤 이들은 탈상품화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대안 체제의 초석으로 본다. 나는 공정무역에 대해 지금까지 우석훈이 말한 것으로는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결론내리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논쟁할 때 상대방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논박하는 방식은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