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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후불제 민주주의》(돌베개) 서평:
어떤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지난해 이맘때 촛불 시위에서 입이 닳도록 부른 〈헌법 제1조〉 노래 가사다.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꿈과 비전이 대한민국 헌법에 모두 들어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 절차를 무참히 짓밟는 ‘문명 역주행’ 정부라는 것을 헌법에 비춰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 진정한 민주주의는 아래로부터 운동으로 창출된다. ⓒ사진 이 미진

“헌법 제1조는 ‘존재’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당위’를 선언한 것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이 책이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시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몸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시민은 이명박 정부가 촛불집회를 주도한 단체 실무자들을 구속한 일, 군 장병들에게 불온도서 목록을 내려 보낸 일, 국가보안법, 미네르바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한 일 등 수없이 많은 일들이 헌법을 위반한 것이라며 조목조목 지적한다.

저자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할부금을 다 치르지 않은 채 타고 다니는 승용차와 비슷하다.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를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다 치르지 않았다”며 민주공화국에 들어가는 비용을 ‘후불’하려면 위대한 시민 행동이 필요하다고 옳게 지적한다. 이 책의 제목이 ‘후불제 민주주의’인 이유다.

그러나 이 책의 2부 ‘권력의 실재’에서 헌법의 이상과 현실은 격차가 있다며 노무현 정부의 개혁 실패를 합리화한다.

유시민은 “참여정부는 경제 양극화, 보수 편향의 담론시장, 그리고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재편이라는 제약 조건 아래서 국정을 운영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거리일 뿐이다. 노무현 정부는 ‘경제 양극화’를 한층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보수 편향의 담론시장’을 문제삼지만 노무현은 국가보안법 개폐, 언론 개혁 등에서 우익의 압력에 거듭 타협해 우익을 강화했다.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재편’ 속에서 이라크 자이툰 파병을 결정해 친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노무현 정부 개혁 실패의 근본 원인은 노무현 정부의 사회적 기반과 성격 때문이다.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은 자유주의적 자본가들과 중간계급 지식인, 일부 사회단체와 노동조합 지도자들까지 아우르는 다계급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

선출되지 않은 자들에 굴복한 노무현

저자는 이명박 정부와 달리 “참여정부 시절 민주주의라는 주제는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쓸쓸한 산장의 여인’처럼 되어버렸다”고 했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를 무참히 짓밟았다. 한미FTA 반대 시위를 원천봉쇄해 집회·시위의 자유를 가로막았고,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자이툰 파병을 강행했다. 신자유주의와 친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며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은 이명박 정부와 다를 바 없었다.

유시민은 “선출되지도 않았고 교체될 일도 없는 최강 권력 보수 언론”과 “선출되지 않는 시장 권력”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이 사실이 노무현의 개혁 실패를 정당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열린우리당이 선출되지 않은 자들에 쉽게 굴복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시민은 보수 한나라당에 맞서려면 상이한 사회적 기반을 가진 열린우리당 같은 정당을 새롭게 만들거나 아니면 다양한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진보 세력이 연합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각한 경제 위기 시기에 지배계급의 일부를 포함하는 다계급 정당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처럼 파산할 수밖에 없고 한나라당에 제대로 맞설 수 없다. 보수 한나라당에 일관되게 맞서고 진정한 민주개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이다.

우익의 준동으로 탄핵된 노무현을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으로 구출했을 때 정작 열린우리당은 저항 운동과 거리를 두려 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보수 우익보다 대중 운동을 더 두려워한다.

또 계급협력 정치는 자유주의적 자본가들과 관계가 적대적으로 되지 않도록 노동자 투쟁을 어느 수준에서 억눌러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의식 발전을 가로막는 데 일조할 뿐이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을 자본가들이 그대로 내버려 두겠는가?

따라서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맞서려면 자유주의 자본가 정당과 전략적인 동맹을 맺을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독립적인 정치적 대안을 건설하고 아래로부터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노무현 개혁의 실패와 유시민의 이상인 자유주의 민주공화국의 한계는 헌법 자체의 모순에서도 드러난다. 헌법은 계급 질서를 옹호하기 때문에 온전한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

유시민은 헌법이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한다며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처분에 대한 사적 소유를 옹호”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용 안정을 위해 공장점거 투쟁을 벌이거나 국유화 투쟁을 벌일 때 정부가 경찰력을 투입해 탄압하는 일도 헌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

저자는 “민주공화국이 가장 경쟁력 있는 체제”라며 “법률 시스템”과 “복지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자부하지만, 지금처럼 심각한 경제 위기 속에서 자본가들의 재산과 이윤을 침해하지 않고 어떻게 실질적인 복지 혜택이 가능한가?

또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헌법 제37조 2항) 이 때 ‘국가안전보장’과 ‘공공복리’란 자본가들의 이익과 안녕을 뜻한다.

“헌법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타날 관계법을 지시하고 있다. 일반 조항 속에서 나타난 자유와 유보 조항 속에 기록된 자유의 폐기가 공존한다. 헌법의 조항들은 그 자체에 반대 명제를 담고 있다.”(칼 마르크스의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중에서)

유시민의 이상인 민주공화국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이지 노동자 민주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가 결합돼야 한다. 자본가들의 경제 권력과 자본주의 질서에 도전해 사회의 부를 소수의 특권층이 아니라 다수가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 온전한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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