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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불황의 경제학》:
주류경제학 비판자가 말하는 ‘불황을 체제 내에서 다루는 법’

1994년 1월 대통령 김영삼은 신년연설에서 유난히 세계화라는 말을 여러번 언급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아시아 여러 나라는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었고 한국도 초겨울 어느날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며 가혹한 냉기 속으로 걸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나 이번에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급속한 경기하락과 금융 위기 속에서 답을 찾지 못한 채 허우적대고 있다.

폴 크루그먼, 《불황의 경제학》(세종서적) ● 책 구입하기

이 와중에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책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유는 그가 세계화의 화려한 듯 보였던 꽃과 지금의 악취에 대해서 그 해법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불황의 경제학》(이하 《불황》)은 10년 전에 출판된 바 있다. 이번 출판은 크루그먼이 지난 10년간의 새로운 데이터와 경험을 새롭게 추가하고 대체한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데이터와 경험은 전혀 새롭지 않다. 단지 크루그먼이 얘기하고 싶은 것에 대한 최근 예일 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한 내용은 이미 10년 전에 출판됐다는 점에서, 관점의 차이를 떠나 크루그먼의 관찰력과 혜안은 무척이나 놀랍다.

크루그먼은 《불황》에서 공급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시장에서 소화될 것이라 얘기하며 세계화를 부르짖었던 세력들을 일찌감치 규제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의 화근이라고 말한다. 금융세계화 덕분에 자기자본의 1백 곱절이나 되는 차입자금을 이용해 공격적 투기를 일삼아 온 세력들이 건전한 시장을 뒤흔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환투기 세력만을 탓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수요 측면의 실패로 발생할 수 있는 실물경기 위기를 앞당기거나 의심으로 인한 파산을 유발시켜 시장을 과도하게 위축시켰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헤지펀드를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은행 구실을 해 왔던 헤지펀드들을 이제 규제의 틀 속으로 끌어와야 하고 금융 시스템의 상당 부분이 완전한 국유화에 가까운 상태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는 안전해진 이후에는 금융을 다시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려면 정부의 입김이 더 강해져야 하고 더 과감한 재정지출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그는 “오바마 행정부가 금융 위기를 대충 지나가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며 “근본적인 금융 개혁이 없다면 일본처럼 높은 실업률 속에 저성장이 장기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신자유주의가 저지른 폐해

그는 신자유주의가 저질러 온 폐해 때문에 생긴 대중의 상처를 잘 보듬어 준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도 든다.

과거 부의 과도한 편중을 막고 미국 중산층을 확산시켰던 강한 노동 계급 활동이 그것을 넘어 항구적인 독립된 정치 세력으로 나아가면 어떨까?

한때는 케인스식 처방이 옳았다면 왜 다시 “어리석은 아이디어를 조합해 놓은 공급중시 경제학”(크루그먼이 한 말이다)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지배하다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을까?

그리고 왜 다시 세계는 허겁지겁 케인스의 처방을 끌어내오는 걸까?

주류경제학은 근본적으로 경기변동을 설명하지 않는다. 크루그먼 자신은 《불황》에서 주류경제학은 경기변동을 잘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명하려고 들지도 않는다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시장이 공급 물량을 무리없이 계속해서 소화해내는 모습을 보이면 케인스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 다시 올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이런 얘기가 크루그먼이 이미 10년 전에 아시아 위기를 보며 금융 시스템의 문제를 비판한 점과 그가 주장하는 평등의 정치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때 공급중시 경제학자들을 대거 등용했던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 수요 측면을 중시하는 크루그먼도 약 2년간 그곳에서 일했다. 크루그먼이 말하는 위기 탈출도 자본주의를 구하자는 것이다. 다국적기업에 의한 인도 등 제3세계의 경기 부흥은 자본가들의 선량함이나 인도주의와는 상관없음을 그는 분명히 말한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삶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세계를 구하고자 한다. 그는 국가가 규제를 통해 탐욕을 잠재우는 구실을 하기 바라는 것 같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국가 기관은 누가 운영하며 누구의 지배를 받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평범한 유권자인가? 아니면 고액의 사교육을 받으며 자란 엘리트들인가?

크루그먼은 “금융 시스템을 구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 다소 ‘사회주의적’이라는 우려 때문에 필요한 조처를 취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말한다. 그가 옳다. 그러나 그는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 주지만, 불행히도 자본의 경제 지배력에 근본으로 도전하지는 못한다. 사회주의자들은 크루그먼식의 개혁 조처를 지지함과 동시에 그 개혁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맞선 근본적 도전이 필요함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