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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석 영화칼럼:
타인의 고통

필자 우원석 영화감독은 뉴욕에서 영화 공부를 했고 지금 작품을 준비중이다.

지난 한 해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를 말해 보라면 나는 〈클로버필드〉를 꼽겠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다.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 뉴욕을 초토화시킨다는 내용을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이 영화에 돋보이는 주제의식 따윈 없다. 9.11 테러 때문에 생긴 미국인들의 정신적 외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가 하도 단순해서 심각한 사유를 하기엔 사실 머쓱하다. 그럼에도 괴수영화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정말 딱이다. 아비규환의 뉴욕을 1인칭 시점으로 완성도 높게 찍었기에, 관객들은 마치 자신들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래서 현장감이 무척 풍부하다. 이런 영화는 어차피 롤러코스터다. 괴수영화 팬으로선, 잘 재현된 대형 참사를 제대로 체험하며 스릴과 공포를 만끽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영화적 쾌감, 즉 재현된 참사를 체험하며 느끼는 쾌감의 본질이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다. 가령 〈클로버필드〉가 진짜 다큐멘터리라고 하자(제작진은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하려고 엄청 노력했다. 그들의 소원을 한번 들어줘 보자). 스크린 위 모든 게 현실이라고 치자. 그러면 관객들은 뉴욕의 참사를 더 생생하게 체험할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더 흥미로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스크린의 현실과 자신들의 현실이 구분돼 있음을 안다. 괴물이 제 아무리 진짜라도 스크린을 뚫고 나올 리는 없다. 그래서 스크린 속의 세계를 엿보는 그들은 공포를 느끼는 만큼 안도감도 느낀다. 그리고 안도감을 느끼면 공포의 대상은 감상의 대상, 즉 자극적인 흥밋거리가 된다. 그러니 결국 본질을 따져 보면, 스크린 속 참사 체험의 흥미는 나와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남의 참사를 안전한 곳에서 구경하며 느끼는 쾌감, 즉 일종의 관음증적인 쾌락이다.

공포와 안도감

이런 관음증적 쾌락이 남의 고통과 비극을 다룬 이미지들, 예컨대 전쟁, 빈곤, 폭력진압 등을 고발하는 UCC나 사진의 관람행태에도 있을까. 나는 있다고 본다. 물론 이런 이미지들이 지닌 현실 비판의 힘은 대단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 컷의 사진이나 동영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력은 크다. 가령 전쟁사진이 처음 대중화된 것은 1936년 스페인 내전 때였다. 사진기술이 발전한 덕분에, 당시 기자들은 삼각대를 꼭 써야 하는 무겁고 큰 구형 카메라 대신 작고 가벼운 카메라를 손에 쥐고 전쟁에 참가했다. 그래서 스페인 내전 사진들은 전투 도중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인류 역사상 최초로 ― 이전의 전쟁사진들은 무거운 카메라 때문에 전투 전이나 후의 모습만 담을 수 있었다 ― 담아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프랑코 정부의 잔인함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반전·반파시스트 운동에도 도움이 됐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어찌 되었든 남의 비극을 대상화한다. 세상의 무엇이든 일단 대상이 되면, 보는 사람 처지에서는 감상의 거리감이 생긴다. 그리고 거리감이 생기면 관음증이 끼어들 여지가 생긴다. 지난해 촛불시위 인터넷 중계를 보자. 중계 사이트 채팅방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네티즌들의 중계 사이트 접속과 댓글 빈도수는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해 고통 받을 때, 즉 강렬해서 흥미로울 때 증가했다. 반대로 집회가 평화로워 시위대가 어려움을 겪지 않을 때 채팅방은 한가로워졌다. 그 많은 네티즌들이 갑자기 다 집회에 나갔기 때문이 아니다. 경찰의 폭력에 직접 노출된 시위대와 달리, 자기 방 컴퓨터 앞에서 안전하게 관람하던 사람들에게는 볼거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오해마시길. 인터넷 중계는 그림자도 있었지만 빛도 분명히 있었다.)

미국의 비평가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다. 맞는 말이다. 최초의 자극은 최초일 뿐, 전부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고, 그런 이미지를 감상하고 연민을 보낸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현실의 고통은 언제나 현실의 행동만이 없앨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