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민중 항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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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와 유혈낭자한 장기전을 치른 1988년의 이란은 1979년 팔레비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이들이 꿈꿨던 세상과는 판이했다.
이 혁명가들은 비록 혁명 동안에 등장했던 노동자평의회에는 적대적이었지만 평등한 세상, 즉 독실한 무슬림 노동자라면 먹고살 만한 세상을 꿈꿨다.
새로운 이란에서 그 지도자들은 이슬람 교리를 충실히 따랐다. 국왕과 옛 지배계급의 사치는 과거지사가 될 것이었다. 혁명에 참가한 이들 중 다수는 혁명 후에도 검소하게 살면서 돈의 유혹을 뿌리쳤다.
그러나 이란 경제가 발전하면서 정권의 한 분파와 결탁한 새로운 계급이 점차 부를 축적했다. 경제 중심부에는 이른바 ‘바야드 모스타자핀(이하 바야드)’, 즉 국가와 민간 자본의 경계가 모호한 기업집단들이 있었다. 이 기업집단들은 외환보유고에 접근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고 납세 의무와 회계 감사에서 모두 면제됐다.
바야드는 제조업, 무역업, 대형 건설 프로젝트 등 경제 전반을 통제했다. 이 기업결합체들은 이란인들의 삶 전반에, 심지어 매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거대 복합기업들은 많은 이란인들이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석유로 쌓은 엄청난 부를 걸프 지역 국가들의 대형 프로젝트에 쏟아 부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또 바야드는 민영화의 주된 수혜자이기도 했다.
2005년 대선에서 아마디네자드에게 패배한 하세미 라프산자니는 바야드와 연결돼 있는 가장 유력한 성직자들 중 하나였다. 라프산자니 가문은 석유·건설·무역·농업 등에서 이권망을 형성했다. 라프산자니 자신은 국영 자동차 산업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 경제는 경제 제재 때문에 고립됐지만 프랑스와 영국 같은 중재자들을 활용해 현대식 대공장들을 어렵사리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공장들은 생산성이 낮아 이란 경제가 세계 시장에 완전히 개방될 경우 파산할 가능성이 컸다.
이란 기업주들은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효율성 향상 프로그램을 밀어붙여 왔다. 임금과 노동조건을 대대적으로 공격했고, 결국 노동자 수백만 명이 저임금과 고용 불안정 상태에 내몰렸다.
공장
1979년에도 이란에는 노동계급이 대규모로 존재했지만 혁명 뒤 그 수가 급증해 현재 자동차 산업 노동자만 약 50만 명으로 추산된다. 프랑스 자동차 기업 ‘푸조’와 합작해 건설한 ‘이란 코드로’의 테헤란 공장은 중동에서 가장 큰 공장들 중 하나다.
대다수 노동자들이 청년들인데, 이들은 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란인의 65퍼센트 가량이 25세 미만이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수백만 명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을 때도 나이 든 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된 자리를 메우는 경우가 흔하다.
이들은 임금 인상, 노동시간, 휴가 등 제반 권리를 무시한 이른바 “백지 계약서”에 서명해야 한다. 향후 몇 년 안에 이런 ‘백지 계약’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이 이란 전체 노동자들 중 90퍼센트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2006년 이란 의회는 파트타임 비정규직 노동자를 확대하는 새 법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통령 아마디네자드도 이런 개악을 지지했다. 심지어 어용 노조조차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는데 말이다.
최근 대규모 시위가 있기 전까지 정권의 가장 큰 근심은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고양되는 것이었다.
2004년부터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계속 고양돼 왔다. 벽돌 공장 노동자들, 방직 공장 노동자들, 조립 공장 노동자들 등이 주도한 대중 파업이 벌어졌다. 이 파업들은 대개 임금체불 때문에 벌어졌다.
2004년 코드로 자동차 공장에서 야간조 노동자 몇 명이 과로로 사망하자 비공인 파업이 벌어졌다. 공장 경비대가 극심하게 탄압했지만 노동자들은 오히려 비정규직 계약 관련 요구들을 제기하며 파업을 계속했다. 이스파한 지역을 중심으로 교사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면서 8백여 개 학교가 휴교했다. 파업은 테헤란까지 번져 4백 개 학교가 추가로 휴교했다.
2005년 10월에만 파업이 1백40건 벌어졌는데, 이것은 1999년 1년 동안 있었던 파업의 세 곱절이었다. 이런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비공인 현장위원들을 선출했고 이것은 법외 노동자 단체의 기초가 됐다.
1979년 혁명 뒤 자선·기부 단체들이 생겨나 일종의 사회안전망 구실을 했다. 이 단체들이 요직 임명의 핵심이 되면서 다수 빈민들의 삶이 책임지지 않는 관료들의 자비에 내맡겨지게 됐다.
아마디네자드는 2005년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대중의 치솟는 분노를 활용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서민의 편이라고 내세웠고 결선 투표에서 인기 없는 대선 후보 라프산자니에 맞서 60퍼센트를 획득했다.
아마디네자드가 과거에 국왕이 소유했던 대통령궁에 입주하길 거부했을지언정 그는 결코 비주류 정치인이 아니다.
숙청
아마디네자드는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 반대파 숙청 작업으로 명성을 얻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자기 계파 인사들을 테헤란 시장, 내무부 장관 등 요직에 임명했다. “먹고 살 걱정없이 해 주겠다”던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석유 판매 수익금은 매관매직과 자기 지지자들을 바시지 민병대로 충원하는 데 사용됐다. 아마디네자드는 바시지 민병대를 재무장시키고 그들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취임하자마자 그의 노동정책이 시험대에 올랐다. 테헤란 시장은 바시지 민병대를 동원해 독립노조를 건설하려는 테헤란시 버스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바시지 민병대는 버스 기사들과 그 가족들을 연행하고 만수르 오산루 노동조합 위원장을 불구자로 만들었다. 이 노동자들에게 아마디네자드는 이전 정권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오히려 더 가혹한 정권일 뿐이었다.
기성 정치권의 일부, 즉 라프산자니 동맹 세력들은 아마디네자드를 권력 투쟁의 중심에 있는 위험한 인물로 여겼다. 그러나 이란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인 혁명수비대 내 다수는 그와 바시지 민병대를 점증하는 불만을 잠재울 적임자로 보았다.
이란 지배계급은 대중 운동이 공장 안으로 확대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아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1979년 혁명 당시 팔레비 왕정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이었던 세력은 수개월에 걸친 거리 시위에 뒤이어 파업에 나선 석유산업 노동자들이었다.
번역 조명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