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회복론의 신화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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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경제학계에 미친 악영향 하나는 경제 현상을 심리학의 한 범주로 취급했다는 점이다. 케인스가 말한 바대로, 미인대회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최고 미인으로 뽑힐 수 있겠지만, 경제가 회복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경기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올 여름 최고경영자가 읽어야 할 필독서로 권하는 책 중 한 권인 《야성적 충동》도 “‘심리적 요인’이야말로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1930년대에 일어난 대공황은 비관과 낙담 그리고 회복기의 심리적 변화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했다”고 설명한다.
최근에 제기되는 경기회복론이 객관적 실증이나 통계 수치들보다는 믿음·기대·희망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 예측보다는 심리적 바람에 가깝다.
물론 이런 기대나 희망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외양을 갖추기 위한 근거들도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주가가 1500선을 넘어섰고, 부동산 지표가 이번 위기 전 수준으로 회복됐으며, 6개월 연속 무역수지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고, 1분기(0.1퍼센트)에 이어 2분기에도 플러스(2.3퍼센트) 성장을 했다.
세계적으로도 지난해 9월의 리먼브라더스 파산 직후 특히 금융부문에서 최고치에 이르렀던 불안정성이 점차 해소되면서 각국 정부는 경제 위기를 적절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공포지수(Volatility index)와 신용디폴트스왑(CDS)이 크게 하락한 것은 경기가 더 심각하게 침체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낸다. 이런 기대가 너무 과한 나머지 이번 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평가받는 루비니 뉴욕대 교수의 말을 왜곡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2차 위기
정말 경기회복의 새싹(green shoots)이 보이는 것일까? 경기회복을 전망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지금 출구전략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번 위기의 발화점인 미국의 주택경기는 아직 회복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2009년 5월 미국 20대 도시의 케이스-쉴러(Case-Shiller) 주택가격지수는 자유낙하는 모면했지만(전달 대비 0.5퍼센트 상승) 지난해 동기에 비해 17.1퍼센트 하락했다. 루비니 교수는 “취약한 노동시장” 때문에 “주택가격이 앞으로 13~18퍼센트 더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주택시장이 회복하기는커녕 2차 부동산 위기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 진원지는 바로 상업용 부동산이다. 상업용 부동산은 총 6조 7천억 달러 규모로 미국 국내총생산의 1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호텔과 상가 등을 담보로 한 대출에서 연체와 채무불이행이 늘고 있고 이 때문에 금융권의 차압이 급증하고 있다.
최근 연방의회 합동경제위원회의 캐롤린 맬로니 의장은 “상업용 부동산 시장이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며 “미국 은행들이 2차 대규모 손실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6월 말 현재 차압되거나 파산한 상업용 부동산은 1천억 달러를 넘어섰는데, 이는 지난해 말보다 갑절이 넘는 수치다. 상업용 부동산 가격 하락은 상업용 모기지 담보부 증권(CMBS)의 부실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지금도 이 증권의 10퍼센트 정도인 9백억 달러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2차 부동산 붕괴 조짐과 더불어 신용카드 위기가 미국 경제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가계대출 연체율은 올해 들어 더 높아졌다. 이로 인해 뱅크오브아메리카(BoA), JP모건, 아메리칸익스프레스 등 은행과 신용카드사들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규모는 3천억~4천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연체율 급증의 주요 이유는 실업자가 증가해 가계 소득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공식 실업률은 현재 9.6퍼센트로, 이는 26년 만에 최고치고 1948년 통계 작성 이래 처음으로 실업률이 24.5주 연속으로 오르고 있다.
치솟는 실업률(현재 9.6퍼센트인데, 연말에 11퍼센트까지 상승할 전망)과 높은 저축률 등은 미국의 민간소비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 저축률은 이번 위기 전에는 0퍼센트였다가 지금은 6.9퍼센트로 상승했는데, 향후 11퍼센트까지 오를 전망이다.
미국의 대다수 가정에서는 가처분소득이 줄고 부채가 늘어나기 때문에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 민간소비 위축은 미국뿐 아니라 특히 신흥공업국 경제의 회복을 가로막거나 더디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경기부양
미국 경제 상황이 회복 조짐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블딥에 빠질 가능성이 제기되자 2차 경기부양을 할지 말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누리엘 루비니, 폴 크루그먼, 부통령 조지프 바이든 등은 지난 2월에 발표한 1차 경기부양(7천8백70억 달러)의 약효가 다했다며 추가 경기부양을 제기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섣불리 경기부양을 추진하기 힘든 상황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6월까지 늘어난 재정적자만 해도 1조 1천억 달러에 이른다. 천문학적인 재정적자에 더해 경기부양으로 인한 유동성 확대가 경기를 회복시키지는 않고 인플레만 유발한다면 실질금리만 인상시켜 경기회복을 더 요원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각국)의 경제 사정은 재정지출을 확대하면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케인스의 가르침이 잘 먹혀들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미국의 산업생산은 계속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고 지난 5월의 설비가동률은 기록을 작성한 이래 최저 수준인 68.5퍼센트까지 하락했다. 기업의 구조조정이 실업자를 양산하고 이것이 가계소득을 축소시키고 대출 연체를 높여 기업의 수익성을 저하시키고 그래서 다시 구조조정을 강화하고 생산을 줄이게 만드는 악순환 고리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경기회복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유럽과 일본 경제도 마찬가지다. 산업 생산과 실업률이 미국 못지 않게 심각한 EU 국가들 중에서 특히 영국이 심각하다. 영국의 소비자 레버리지(소비자들이 소득의 얼마만큼을 부채로 지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는 지난 10년 동안 급속히 증가해, 지난 9개월 동안에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1백70퍼센트를 기록했다.
일본 경제도 지난 1분기까지 4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중국의 내수 확대로 인한 대중국 수출 증가가 예상되지만 그럼에도 하반기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5퍼센트 수준에 머무를 전망이다.
그런대로 양호한 경제 성적을 내는 쪽은 중국이다. 그 때문에 중국이 세계경제를 회복시켜 줄 동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증대하고 있다. 하지만 수출과 해외직접투자(FDI)를 통해 고성장을 거듭했던 중국도 이번 위기에서 벗어날 동력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수출 증가율이 20~30퍼센트에 이르던 것이 이제는 거의 제로 수준으로 하락했으며, 그 부족을 정부의 경기부양으로 메우고 있다.
중국 국내총생산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35퍼센트 수준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수출 감소를 민간소비로 메우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중국 정부는 4조 위안(2007년 국내총생산의 16퍼센트)에 달하는 경기부양과 3조 위안이 넘는 은행 신용 확대를 통해 지금의 위기를 모면하고 있지만 재정적자가 늘어나 정부의 재정지출을 통한 경기부양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거품
한국과 중국 등 신흥공업국의 경기회복 주장에 대해 〈블룸버그〉 통신의 아시아경제 담당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페섹은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지역 경제들이 회복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효가 떨어지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의 효과”라면서 “이런 정책은 장기적 해법이 아니라 단기적 처방이며, 경제성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산거품이 새롭게 형성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빠른 회복 신호는 그 자체가 거품”이라는 말이다.
한국 경제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환율이 폭등하고 주가가 급락하는 상황은 모면했을지라도, 또 소비 심리는 회복됐다 할지라도 실물경제는 여전히 암울하다.
올 상반기 설비투자 증가율은 여전히 전년 동기에 비해 20퍼센트 넘게 하락했다. 전경련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6백대 기업의 투자 축소 원인으로 수출과 내수 등 수요 부진(34.2퍼센트), 투자자금 조달의 어려움(16.5퍼센트), 수익성 악화(15.8퍼센트) 등이다. 제조업 가동률은 1997년 경제 위기 수준인 60퍼센트대에 머물러 있다(올 1분기는 65.9퍼센트).
경기침체로 인해 영업이익이 이자비용에도 못 미치는 기업이 2006년 24퍼센트에서 올 상반기에는 33퍼센트까지 급증했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규모도 같은 기간에 8조 원에서 19조 원으로 갑절 넘게 증가했다.
올해 무역수지 흑자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수출 감소보다 수입 감소가 더 큰 폭으로 증가하는 전형적인 ‘불황형 흑자’이고, 3~4년 전에 수주한 선박 수출이나 환율 효과를 제외하면 무역수지 실적은 더 초라해진다.
한국을 포함한 각국 정부는 대규모 경기부양을 통해 경제가 자유낙하하는 것을 모면했지만 이로 인해 경기회복의 조짐이 보인다는 전망은 기대에 불과하다.
루비니 교수는 세계경제가 설사 회복된다 할지라도 매우 볼품없게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실물경제 지표들은 경제가 올 하반기에 다시 추락할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세계적으로 과잉축적된 생산설비의 가치 파괴가 진행되는 동안 경제는 간헐적인 쇼크를 동반한 패혈증 증세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