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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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술의 자유에 대해서
오늘날 문학과 예술의 자유는 ― 그리고 순수 학문의 자유도 마찬가지로 ― 자명한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만일 이것을 억압하는 국가나 사회, 집단 등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야만적·후진적인 경우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처럼 거의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받는 예술의 자유는 인간의 역사적 투쟁을 통해서 얻어진 것으로서, 그것의 이념적·실천적 기원은 잘 알다시피 서구의 근대 속에 있다. 가령, 서구적 근대의 역사적 보편성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철학자로 간주되는 헤겔의 경우, 예술과 종교 그리고 철학을 우리 인간 “정신(Geist)”의 현실적인 역사적 자기완성 ― 즉, 인륜성(Sittlichkeit)이라는 궁극적 개념 아래 법의 모든 과정을 구성하는 합리적인 보편 국가의 형성 ― 의 차원을 넘어서는 “절대 정신”의 영역에 두고 있다(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lrisse 1817).
요컨대, 예술과 종교 그리고 철학은 무엇이 참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를 특징으로 하는 그 자체로 무한하고 영원한 정신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 자유에 대한 사변 철학의 이 같은 합리적인 담론들이 나왔다고 해서 예술과 예술가들의 자유가 실제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헤겔 철학의 좌파적 해석의 영향 아래 있던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을까.
“작가는 글을 쓰면서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을 벌어야 하지만,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 글을 쓰며 살아서는 안 된다 … 작가는 결코 자신의 작품들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 그것들은 작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결코 수단이 아니기에 바로 작가는 필요한 경우 작품들의 존재를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희생하는 것이다. 출판의 자유의 첫째 조건은 직업이 아니라는 데 있다.”(다음의 “선언”에서 재인용, André Breton & Diego Rivera[L. Trotsky], “Pour un art révolutionnaire indépendant”, Mexico, 1938; L. Trotsky, Littérature et révolution, Paris: 10/18, 1974에 재수록.)
창작의 자유와 경제적 독립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당시에 이념적으로 당연한 가치였던 작가의 창작의 자유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제약으로부터의 독립을 얻어내는 것이 대단히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암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 말을 스스로 실천해 가면서 평생을 살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표적인 어느 한 개인의 신념과 실천만으로 사회 속에 예술의 자유가 현실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특정한 집단으로서 예술가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무엇이 참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실제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인정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을 따르자면 예술가들이 주어진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스스로 구성해 나가는 사회적 실천 공간이 경제나 정치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장(champ, field)”을 형성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Pierre Bourdieu, 《예술의 규칙 Les règles de l’art, Paris: Seuil, 1992 [1998]》; The Rules of Art, Stanford, 1996).
어떻게 보면 부르디외의 이러한 견해는 그 자신이 표명하는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도 더 마르크스주의적인데, 그것은 예술의 자유를 흔히 상식적인 수준이나 도그마적인 관점에서 내세우는 문화적 가치라는 추상적 보편성에 근거를 두고 정당화하기보다는 그것의 실제 기초가 되는 상대적 자율성의 역사적·사회적 조건들과 연관지어서 해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의미 있는 것은 예술의 ― 그리고 학문도 마찬가지이지만 ―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립이 헤겔 식의 사변적인 목적론적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한 분석적 고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거의 자명한 가치처럼 받아들여지는 예술의 자유는 실제로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 작업이 바로 부르디외의 《예술의 규칙》인데, 그러면 적어도 프랑스에서 주로 문학의 경우 예술의 상대적 자율성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를 이 책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2. 문학 “장”의 자율성 ─ 그 역사적 기원과 구조
주체 중심의 이론과 구조주의 둘 다 극복하며 종합화하려는 부르디외의 방법론에 따르면, 주어진 사회적 대상 ― 혹은 행위자 ― 에 대한 이해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의 분석과 해명이 필요하다. 첫째, 대상이 속하는 “장”의 역사적 기원과 장의 구조 속에서 대상이 차지하는 위치. 둘째, 여기서 대상이 갖는 객관적 가능성과 불가능성, 대상을 특징지워주는 “하비투스(habitus)”, 그리고 이상의 것들을 매개로 해서 대상이 그려내는 궤적(즉, 지향점의 선택과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행하는 실천적 전략들). 셋째, 이것이 사회적 “장들” 전체의 총체화 과정 속에서 역사적·사회적으로 갖는 의미(여기에는 이상의 모든 것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자 자신의 객관화 작업, 즉 자기 반성적 작업도 포함된다).
이러한 방법론에 근거를 두고 부르디외는 “1848년” 전후(前後) 연대기라고 할 수 있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 Education sentimentale 1869》에서 문학 장의 발생기를 그려내고 있는 대표적인 예술적 사례를 본다. 소설 속에서 인물들의 배치와 행로가 예술과 정치 대 정치와 사업을 대립으로 하는 권력 장의 구조를 바탕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이러한 작품읽기에 착안해서, 부르디외는 문학 장의 발생기를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는 “임계 국면(la phase critique)”으로 규정하고 있다(대략 1840~1880년의 시기).
이 단계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요인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경제 호황으로 대부르주아들의 득세, 개별 주문에 만족하던 그전 시기와는 달리 예술의 “구조적 종속”을 바라는 나폴레옹 3세를 정점으로 하는 권력층, 이들의 직간접적 지원을 받는 부르주아 취향의 예술가들의 번창, 중·소부르주아 출신의 대학 입학 자격자들의 증가와 이에 따른 예술가 지망생들의 증가, 이로부터 ‘사회 속의 사회를 형성하는’ 삶의 방식으로서 보헤미아 식 생활 스타일을 창조하는 “프롤레타리아 꼴의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 prolétaroïde)” 형성과 이들을 중심으로 창조적 신참이나 이단자를 기꺼이 수용하는 예술 시장의 형성, 이로써 이들과 부르주아와의 단절 등. 이러한 상황에서 부르주아 예술이 번창하고 있었다면, “사회적 예술(l’art social)”은 힘겹게 유지되고 있었다.
보들레르와 플로베르
이 두 경향 사이에서 보들레르는 전자에 대해서는 경멸과 부정의 태도를 그리고 후자에 대해서는 무관심의 태도를 취하면서, 그리고 플로베르는 양자 모두에 경멸적 태도를 보이면서, 각자 예술을 위한 예술을 정립시킴으로써 문학 장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요컨대, 이 두 작가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제 예술은 스스로 자기가치화와 자기 자신에 대한 “공식적 인정(consécration)”을,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시집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1857〉의 발표로 재판에 회부되기까지 했던 보들레르가 1861년에 프랑스학술원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후보로 신청한 것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상징적 “입법행위(nomothète)”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보여 주는 순수 미학주의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중립주의나 혹은 니힐리즘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권위주의나 순응주의에 대한 거부,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근간인 노동과 생활의 엄격한 규율에서 벗어남 등을 특징으로 하는 ‘위대한 직업적 예술가’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렇게 자율성을 획득하자, 문학은 그리고 나아가 예술은 이제 자기 내부에서 예술적 인정, 돈, 정치를 축으로 해서 행위자들이 서로 대립적 경쟁이나 이행 관계들을 보이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공간이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축들과 더불어 문학과 예술이 스스로 자신의 장을 조직하는 원칙은 두 가지다.
첫째는 순수 문학 대 대중 문학의 대립이라는 원칙인데, 이것은 당연히 돈 문제를, 경제적 이익 문제를 반영한다. 그리고 둘째는 순수 문학 내에서 아방가르드 대 인정받은 (혹은 권위화한) 아방가르드의 대립 원칙이다. 이러한 이원적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문학 장은 19세기 말의 경우 장르들의 통합과 차별화라는 점에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경제적 이익은 연극 〉 소설 〉 시 순으로 배열되며, 내부의 인정 순위는 그 역으로, 즉 시 〉 소설 〉 연극 순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구조로서 형성된 문학과 예술의 장은 상품이자 의미의 실현체인 상징적 재화(les biens symboliques)의 본질 자체에 근거를 두는 그 이면의 경제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러한 경제가 가능한 것은 예술 작품 속에서 상징 가치와 상품 가치가 상대적으로 별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문학과 예술의 경제는 순수 예술의 반(反)경제적 논리 대 예술 산업의 경제 논리의 대립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그렇다고 전자가 반드시 비경제적인 것, 이익을 못 낳는 것만은 아니다. 자기가치화와 자기 인정이라는 자율적 역사에 근거하는 순수 예술은 어떤 특정한 조건들에서는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아주 커다란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다. 따라서 오늘날 문학 시장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행위자로서 출판사는 이러한 대립 구조 속에서 자신의 적절한 전략적 위치 선택을 한다. 한편에는 장기간을 바라보는 순수 문학의 출판사들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단기간의 수익을 바라보는 출판사들이 있다. 문학의 입장에서는 전자의 출판사들이 더 바람직하지만, 문제는 문학 작품의 생산과 유통이 불확실성과 요행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후자의 출판사들의 경제 우선주의적 태도 역시 자신들이 출판하는 작품들이 상징적 자본으로 전환되어야만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상징적 생산물들의 시장에서 행위자들이 ― 작가들, 비평가들, 출판사들, 화상들, 극장 감독들 등 ― 상징적이거나 경제적인 것에 또는 양자 모두에 걸쳐서 유일하게 적합한 자본 축적 방식은 명성을 만드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술의 자기가치화와 자율성에, 반(反)경제적 논리에 근거를 두는 새로운 아방가르드들과 기존의 시장 질서 사이에 역동적 관계가 발생하며, 이로부터 예술적 생산의 장에 세대간의 ― 단순한 연령적 구분이 아니라 예술 생산 방식의 아방가르드적 차이에 근거를 두는 ― 시간성이 발생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문학 장과 그 이면의 경제 ― 다른 예술의 장들도 위와 같은 구조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 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드러나는 일반적 특징은 상징적 자본의 축적을 추구하는 내부적 경쟁이 장 자체의 성립과 지속을 위한 게임 규칙과 전제들에 관한 “결탁(coallusion)”을 은폐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드러냄을 통해서, 즉 문학 장에 근원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참여로서 “놀이하기(illusio; 게임 참여는 그 규칙과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에 근거를 두는 작품 생산의 감춰진 사회적 측면을 밝힘으로써, “위대한 창작”에 내포된 카리스마적 이데올로기를 유보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예술적 생산의 가치를 절대화하지 않고, 교환 가치와 관계해서 그러한 가치의 개별적이며 주관적인 척도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리고 또 어떤 논리를 따라서 그러한 척도들이 종합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학문적 가능성을, 즉 “유용성과 가치의 사회적 생산에 관한 경제학”의 가능성을 갖게 된다.
3. 자본주의 대 예술의 자율성
이상과 같은 부르디외의 분석에 근거를 두고 우리가 좀더 일반화를 시도해 보면, 예술의 자율성은 현실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형성돼서 그 선도적 모형이 다른 나라들로 확산돼 나가는 과정을 밟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예술 관계는 당연히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거나 혹은 “규정하는(bestimmen)”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대다수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에서 이런 식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는 가령, Raymond Williams, “Base and superstructure in Marxist cultural theory”, New Left Review, 82, 1973을 참조할 것).
그것은 오히려 비경제적인 것의 경제라는 고유한 구성 원칙을 특징으로 하는 예술적 생산물들의 시장을 매개로 해서 불안정한 균형 상태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즉, 원칙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 예술적 생산의 물질적·경제적 한계가 객관적으로 주어지지만, 그러나 그 한계 내에서 예술은 자신의 미적 원칙을 스스로 구성하고 결정하며, 자본주의의 경제 원칙과 예술의 미적 원칙이 직접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시장을 매개로 해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균형 상태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는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서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가령, 스탈린 시대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전까지 러시아의 경우, 파시즘 시기의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 프랑코 독재 시대의 스페인 등. 이러한 사례들은 자본주의의 현실적 위기가 폭압적인 정치를 통해서 돌파구를 찾을 때 예술의 자율성이 쉽사리 파괴될 수 있음을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예술의 자율성이 비록 역사적으로 19세기 서구 자본주의에서 사회적으로 가능한 현실적 동력을 얻었을지라도 그것이 자본주의와 예술의 자율성 사이에 어떤 내재적인 필연적 연관을 의미하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 시기에 예술의 자율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위의 부르디외의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 중반 프랑스 사회의 다음과 같은 특수한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본의 지배력은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을 꾀했으나, 미처 여기에 흡수될 수 없었던 젊은 예술가 지망자들의 급격한 증가와 이들을 중심으로 부르주아 규범에 반항적인 보헤미안적 생활의 영위가 가능한 사회적·예술적 공간의 형성, 그리고 부르주아 출신의 몇몇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자기 계급에 대해서 던진 일종의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적 단절과 이에 대한 비평가들의 옹호 등과 같은 요인들의 결합이 자본에 대한 예술의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얻어낸 예술의 이러한 성과는 르네상스 시기부터 꾸준히 형성돼 온 지식인들의 유럽 문화라는 공통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확산돼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사회적 고찰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봉건 질서에 대해서 자본주의 질서가 갖는 발전적 측면이 예술의 자율성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르주아의 지배에 반항하는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독립적인 실천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맨 앞에서 인용한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순진한 글에서도 보았듯이, 예술의 자율성은 오히려 어떠한 경제적 제약이나 정치적 압력과도 태생적으로 모순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의 대두와 함께 오늘날 예술의 이러한 자율성은 다시금 자본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다. 이것은 부르디외와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같은 작가들조차도 경고했던 현실이다(부르디외, 〈위기 속의 문화〉, 2000년 9월 서울 국제문학포럼의 발표문: 솔제니친, 〈문화는 고갈되었는가?〉(1997), 계간지 《아시아》, 2009, 제12호에 번역 수록). 이들이 경고하는 오늘날 현실의 부정적 양상들을 요약하면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미국식 문화산업의 모형이 지배적인 것으로 세계화하면서 문화적 생산물들은 오늘날 점점 더 문화상품으로 취급되면서 그 내용적인 고유성을 상실하고 획일화하고 있다는 것이다(가령, 〈노트르담의 꼽추〉의 에스메랄다가 디즈니사에 의해서 행복하게 결혼하게 되는 것이나,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예술 작품들이 국제 교역에서 단순한 상품으로 분류되는 것 등을 생각해 보라).
둘째, 이와 맞물려서 문화적 생산과 유통을 점점 더 소수의 거대 자본들이 장악함으로써 문화 생산자들, 즉 예술가들은 점점 더 그전의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더 직접적으로 자본의 요구에 종속당하고 있다.
셋째, 이러한 과정들이 결국 독자들에게서 미적 감수성의 평균화·동질화·수동화를 낳고 이것이 다시금 예술적 생산으로 이어지면서, 예술의 본원적 가치 ― 즉, 현실과 개인의 삶 사이의 관계를 지각과 감수성의 층위에서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의미화함으로써 세계와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더 풍부하게 해 주는 것 ― 조차도 붕괴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예술의 자유를 위한 투쟁
만일 현 단계 자본주의의 이러한 위협 앞에서 예술의 자율성이 패배한다면, 그 재앙은 단지 예술가들에게만 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극히 소수인 자본가들의 이익과 거기에 결탁한 관료들, 여론호도용 전문가들과 학자들의 기생적 이익 앞에서 인류 전체가 자신의 삶의 본원적 존엄성과 창조성의 일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위기에 대해서 부르디외는 《예술의 규칙》의 “후기(Post-scriptum)”에서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보편자의 협동주의(une corporatisme de l’universel)”로 맞설 것을 제안하고 있다. 요컨대 통상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를 대변해 온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이제 그들이 속한 장의 고유한 자율성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직업적 이익과 독자성을 위해서 집단적으로 단결해 투쟁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동업자들의 집단적인 자기방어와 이기심의 발로로 비치지 않을 근거는 물론 예술과 학문이 갖는 보편적 가치에 있다.
그럼에도 캘리니코스가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부르디외가 제안한 것과 같은 종류의 투쟁은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이상 권력과 자본에 대한 로비 수준의 압력으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하다(A. Callinicos, “Social theory put to the test of politics”, New Left Review, 236, 1999).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실천보다는 차라리 초현실주의(surréalisme) 운동을 주도한 앙드레 브르통이 트로츠키와 함께 작성한 “독립적인 혁명적 예술을 위하여(Pour un art révolutionnaire indépendant, 1938)”라는 선언을 참조해 볼 필요가 있다(이 선언에서 트로츠키의 서명은 그의 요청에 따라 디에고 리베라의 서명으로 대체돼 있다).
한편으로는 파시즘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탈린주의에 의해서 그리고 또한 절박하게 다가오는 참혹한 전쟁의 위협 아래 예술과 학문의 자유가 박해받고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이 선언만큼 예술의 자유와 혁명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식화한 것도 드물 것이다.
“혁명은 만일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 중앙화된 계획의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할 책임이 있다면, 지적 창조를 위해서는 바로 그 처음부터 지적 자유의 아나키즘적 체제를 확립하고 보장해 주어야 한다. 어떠한 권위도, 어떠한 제약도, 티끌만 한 지휘감독도 없어야 한다! 전에는 결코 없었을 실로 장대한 과제들의 해결을 위해 일할 다양한 지식인 모임들과 예술가 집단들은 외부의 티끌만 한 제약도 없이 오직 자유로운 창조적 우애의 기반 위에서만 출현할 수 있으며, 풍부한 결실을 맺는 작업을 펼칠 수 있다.”
사실 “선언”의 이러한 전망은 1920년대 전반기 소비에트 러시아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트로츠키의 다음과 같은 입장을 좀더 명확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행기에 우리의 예술 정책은 혁명의 토양 위에 나타난 상이한 예술 단체들과 경향들로 하여금 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고, 그들 모두에게 혁명에 찬성인가 아니면 반대인가 하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나서 예술적 자기결정의 영역에서 전적인 자유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래야 한다.”(《문학과 혁명 Литература и революция, Москва: Красная Новь, 1923》;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
따라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과 실천에서 예술의 자유는 명백히 반혁명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옹호돼야 하며, 마찬가지로 진지한 예술적 독자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 역시 예술의 자유를 위한 자신들의 투쟁을 인간의 해방이라는 궁극적이고 보편적 전망과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선언”의 마지막 구절처럼, ‘예술의 독립은 혁명을 위한 것이고 혁명은 예술의 결정적 해방을 위한 것’일 때, 위협받는 자신들의 자율성을 위한 예술가들의 집단적 투쟁은 사회적으로 더욱 풍부한 의미를, 그리고 실천적으로 더욱 확실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천적 지향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어떤 특정한 예술적 입장이나 분파가 ― 가령, 프롤레타리아 문학론이나 민중 예술론 등처럼 ― 혁명적 대의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처럼 보일 경우조차 그것이 예술가들의 집단적 투쟁에서 독점적인, 혹은 지도적인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특정한 입장을 대변하는 창작과 비평 이념이 ― 가령, 스탈린 시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같은 괴물이나 이보다는 완화된 형태의 비판적 리얼리즘 등처럼 ― 마치 감독관 구실을 하게 되면서 예술의 자율성 자체가 훼손당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문학과 혁명》
이 점을 예증적으로 생생하게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 가령 1924년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트로츠키가 프롤레타리아 문학론자들과 벌인 논쟁인데(이 텍스트는 그의 《문학과 혁명 Литература и революция》의 2판(Москва: Гос. Изд., 1924)에 수록돼 있다), 거기서 그는 당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정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물론 예술의 창조성이란 자율성에 기반을 두는 것이며, 앞서 부르디외의 분석에서 보았듯이, 이 자율성은 역사적으로 예술가 개인이나 특정한 단체 또는 경향에 의해서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장”의 형성과 더불어 집단적으로 쟁취된 것이기 때문이며, 또 필연적으로 그렇지 않고서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지금까지의 일반적 고찰을 바탕으로 예술의 자율성에 관한 한국의 현재 상황을 생각해보자. 한국 문학의 경우 부르디외 식의 문학 “장”이 외형적으로나마 형성된 것은 아마도 1930년대일 것이다. 이 시기에는 문학성에 대한 근대적인 독자적 기준도 어느 정도 형성되고, 정치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을 축으로 해서 다양한 입장들이 경쟁적으로 공존하면서 문필가들의 상징적인 권력 또한 식민지 지배층이나 대중으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당연히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의해서 일정한 주제 영역에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분단 상황으로 인해서 이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북한의 경우는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다면, 남한의 경우는 지속적인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그리고 거기에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 지식인들이 동참함으로써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문제의 많은 부분을 해소할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외형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내실을 갖춘 문학·예술·학문의 자율적인 “장”들이 형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보안법에 의한 규제와 권력기관에 의한 자의적인 탄압은 비록 그 적용 범위와 수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어서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은 IMF 사태로 이어지면서 많은 출판사들과 영세한 문화생산업자들이 도산하게 되며, 문화 영역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거대 자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그 결과 작가, 예술가, 지식인 같은 문화 생산자들은 더욱더 유통업자들이나 기획자들 그리고 대형 미디어 등이 요구하는 상업적 이익에 종속됐다. 더구나 한층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강화된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방부의 금서 조처나 교과서 파문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국가기관의 자의적인 조처에 의해서 한층 더 침해당할 위험이 커진 상태이다.
이상과 같은 짤막한 개괄에서, 한국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이유인 예술과 학문의 자율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어떠한 집단적 투쟁과 실천적 전망이 요구되는지는 자명해진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