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는 파산했지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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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가을 자본주의 체제가 경제 위기에 빠져들자 지난 30년간 전 세계를 지배했던 신자유주의 또는 자유시장 질서의 정당성이 의심받았다.
최근 두바이의 금융 위기는 체제가 여전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황혼’을 논하기에는 시기상조인 것 같다.
신자유주의의 변종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변종은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키려고 실용적 유연성을 보이면서도 신자유주의의 핵심 내용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은행의 부분적 국유화 같은 조처들은 일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 개혁을 성취하려는 조처가 아님은 분명하다.
변종을 추진하는 자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금융 기관들의 만행이 현재 위기의 원인이라고 비난한다. 〈뉴스위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다. 금융, 민주주의, 세계화, 궁극적으로는 윤리의 위기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성장을 이루지도, 인플레이션을 완화하지도 못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기업 이윤율의 회복은 일시적이었고 그나마 대단히 불균등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왜 아직도 영향력이 큰가?
19세기 신고전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는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다.
신고전경제학은 주로 특정 자본가 계급 분파의 이익을 대변했다. 극단적 개인주의를 강조했고, 재화의 생산보다 소비를 중시했다.
어떤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이런 태도가 자본가 계급 전체로 확산됐음을 보여 준다. 이탈리아 언론인 로레타 나폴레오니는 심지어 지배계급이 ‘유한계급’이 된 새로운 ‘황금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과장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빈민과 노동자 들을 희생시켜 개별 자본가들에게 이득을 준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국제 지배자들 상당수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변종
지금 상황은 1970년대 경제 위기 발생 시점으로 다시 되돌아간 듯이 보인다. 거의 35년이 지났는데도 똑같은 문제에 동일한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고, 그것의 피해자도 동일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곤 한다. 마르크스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과 위인 들은 한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지배계급이 자기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전혀 웃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처음의 비극이 더 커지고 심각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1970년대 말과 비교해 두 가지 차이가 있다.
먼저, 신자유주의의 초기 집행자들 ― 특히, 마거릿 대처나 로널드 레이건 같은 신자유주의 ‘전위’ 정권들 ― 은 핵심 목표와 전략 들을 공유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의 후계자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충격에 빠져 일관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단 하나의 사실에 합의를 보고 있다. 즉, 경제 위기의 대가를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떠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대다수 사람들에게 경제 영역은 더 불확실해졌고 정치 영역은 더 의미가 없어졌으며, 사회 영역은 더 파편화하고 문화 영역은 더 수준이 낮아졌다. 인간이란 단지 탐욕의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공격에 저항하고 있다.
과거에 자본주의를 구조조정하기 위해 이른바 ‘일시적’으로 생활수준 하락을 감내해야 한다는 주장을 믿었던 사람도 또다시 속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희생으로 사회 최상층이 자기 배만 불리고 경제 위기의 재발을 막지 못하는 것을 봤다.
또, 영국 노동당이 자본가 정당의 대안이라는 사고는 12년간 지속된 노동당 정부의 ‘사회적 자유주의’ 아래 타격을 입었다.
이런 변화로 사람들은 끔찍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계급의식의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좌파가 사람들에게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말이다.
번역 김용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