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마르크스는 “물질적 생산 수단을 통제하는 계급이 정신적 생산 수단도 통제한다”고 했다.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는 이 책의 슬로건은 마르크스의 그 말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다. 그 슬로건에 걸맞게, 《신문 읽기의 혁명2》는 경제와 정치를 연결하는 고리로서 신문(넓게는 언론)의 구실을 훌륭하게 규명하고 있다. 전작 《신문 읽기의 혁명1》이 신문 지면과 편집 자체에 대한 책이라면, 이 책은 ‘지면 너머’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개혁적, 진보적 언론운동의 확대로 지면과 보도에 대한 분석, 비판은 상당히 대중화됐다. 그러나, 신문 지면의 ‘토대’를 분석한 미디어 정치경제학적 저작은 한국에서는 아직 드물다. 이 책이 완전한 ‘미디어 정치경제학’ 서적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현상 분석에서 미디어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틀을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신문 지면 뒤에 가려져 있는 정치경제 현상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다.
책의 첫째 마당에서 저자는 신문들이 정치와 경제 현상을 의도적으로 분리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평범한 독자들의 이해관계와 상충함을 지적한다. 또한 신문 지면의 내용은 사실상 신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기반하고 있으며, 신문 지면에 드러나는 정치-경제 현상을 연결해서 읽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신문 읽기가 시작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책은 “신문이 정치경제 현상이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신문을 읽어야 한다”것을 핵심 명제로 삼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기준과 지층을 제시한다.
훌륭한 분석을 담고 있지만, 이 책이 신문 ‘읽기’의 혁명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지적할 만하다. 신문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문 시장의 독과점 문제이며, 독과점 신문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계급적 문제임을 정확히 지적하면서도, 그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쉽게도 몇 가지 오류들 역시 발견된다. 가령 신문 읽기의 “황금 잣대”라고 표현한 ‘진실’, ‘공정’을 담보하는 것이 각 신문의 ‘사랑’이라는 주장은 앞의 논의와도 배치될 뿐더러, 현실적이지도 않다. 신문들이 진실과 공정을 외면하는 가장 중요한 배경은 (‘사랑’ 같은) 도덕 관념이나 정파성이 아닌 계급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신문 읽기에서의 ‘주권 혁명’ 공간으로서 인터넷 공간을 지나치게 예찬하고 있다는 점도 아쉽다. 저자가 주장하는 ‘직접 언론’의 실현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인터넷 공간에서의 새로운 지배이기 때문이다.
책 의 내용대로 따라가노라면, “신문 잘 읽고, 블로그 열심히 하자”는 실천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마땅히 사회적 공공재여야 할 언론이 자본가 계급의 ‘정신적 생산 수단’으로 기능하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자본가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시나브로 젖어들게 하는 가랑비”를 잘 피하는 것뿐 아니라, 그 가랑비를 그치게 할 대안이 필요하다. 그 대안은 자본주의적 신문 생산 시스템의 문제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송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