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국주의가 아이티를 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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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지진은 엄청난 파괴와 죽음을 낳았고, 이 나라의 가난 때문에 사망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이티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예들 자신의 힘으로 노예제를 타도한 나라다. 그러나 12년 동안 싸워야 했고, 그 과정에서 인구의 3분의 1이 죽고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고 모든 경작지가 폐허로 됐다.
둘째 이유는 아이티인들이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저항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이다.
영국, 유럽과 전 세계 많은 곳에서 농민들이 자기 땅에서 쫓겨나면서 도시와 농촌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형성됐다.
아이티에서는 그 과정이 1970년대에야 시작됐다. 당시 토착 준군사 조직의 압력 아래 공격적 신자유주의 조처들이 도입되면서 많은 소농이 자기 땅을 떠나야 했다.
아이티 농업이 수입 농산품과 경쟁할 수 있도록 돕던 관세가 사라지고 공공지출이 삭감되고 공공자산이 매각됐다.
아이티인들은 이것을 ‘미국인의 계획’, 또는 ‘죽음의 계획’이라고 부른다. 이 정책들의 목적은 노동을 생계형 농업에서 좀더 ‘이윤이 남는’ 산업인 경공업이나 의류업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자기 땅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대규모로 도시 슬럼가 ― 예컨대 공장 지대 바로 옆에 위치한 시테 솔레이유 ― 로 이주했다.
높은 실업률 때문에 아이티의 임금 수준은 이 지역에서 가장 낮은 하루 2달러 수준(이웃 도미니크공화국의 4분의 1수준)이었다.
아이티군과 준군사 조직 ‘마쿠테’는 사람들이 노조를 결성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압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자 군대의 통제력이 약화하기 시작했다.
대중 저항의 힘이 군대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고 1990년 아이티인들은 군부와 미국의 계획에 반대하는 대통령(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을 선출했다.
그리고 이런 아이티인들의 저항에 대한 반격이 바로 아이티인들을 계속 가난하게 만든 ― 정확히 말해 아이티인들은 20년 전보다 더 가난하다 ― 셋째 이유다.
1990년 이후 아이티 엘리트들과 국제적 후원자들은 아이티 대중 운동을 파괴하고 운동의 지도자들에게 타격을 주는 캠페인을 쉬지 않고 벌여 왔다.
지난 20년 동안 아이티 민중 대 아이티 엘리트와 군대의 대결 구도가 아이티 정치를 결정했고, 이 대결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1990년 이후 아이티의 소수 지배계급은 아이티 민중이 신자유주의 ‘개발’을 받아들이게 만들 방법을 찾았다. 또, 그들은 기존 질서의 ‘안정’을 보장할 새로운 군사적 수단을 찾았다.
처음에는 대중 운동이 유리한 고지에 서 있는 듯이 보였다. 특히 대중 운동은 1980년대 말에 급속히 성장했다. 이 운동은 해방신학과 라틴아메리카의 반제국주의 전통에서 영감을 얻었다.
아리스티드와 그 주변 인사들은 사회정의뿐 아니라 계급과 부의 불평등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들은 또한 군부와 마쿠테에 맞선 대중의 자위권을 옹호했고, 아이티의 엘리트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아리스티드가 67퍼센트를 득표해 처음 당선했을 때, 군부는 상투적 수단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가 통제권을 회복하자 1991~94년에 수천 명이 살해됐다.
아리스티드는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가 아이티에서 자행되는 끝없는 폭력을 보면서 대선 운동당시 반대했던 신자유주의 정책들의 일부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나서야 아이티로 복귀할 수 있었다.
미국과 아이티의 미국 동맹들은 아리스티드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너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하고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대중 운동이 파괴되거나 네가 우리가 원하는 정책을 받아들이는 타협을 해야 폭력을 멈출 것이다’ 하고 말했던 것이다.
위협
아리스티드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오랫동안 저항했다.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아리스티드가 더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 1994년 9월 ‘민주주의 회복’을 명분으로 아이티에 군대를 보냈다.
사실, 미군은 아이티에 6년 동안 주둔했고 아이티를 충실한 친미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드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성취했다. 그는 아이티로 돌아온 뒤 미군의 보호를 이용해 아이티 군대를 해체했다. 전통적으로 지배계급의 보호막 구실을 하던 기구를 약화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진전이었다.
동시에, 아리스티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할 수 있는 좀 더 강력한 정치 조직을 건설했다. 이 조직이 라발라스가족당이다.
이 정당은 첫 번째 쿠데타 이후 탄압 받은 대중 운동의 잔해에서 탄생했다. 아이티의 극단적 빈곤 수준을 감안하면, 이 정당에 기회주의자들이 몰려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라발라스가족당은 완벽한 조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정당이 아이티의 의회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시도인 것은 분명했다.
아리스티드는 2000년 대선에서 승리했고 라발라스가족당도 의회 선거에서 큰 표차로 다수당 ― 의석의 90퍼센트를 차지했다 ― 이 됐다. 이렇게 해서 군부가 제거된 아이티에서 대중적 지도자가 당선했고 진정한 사회 변화의 전망이 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아이티의 지배계급은 아리스티드를 약화시키고 그의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아이티 역사에서 가장 공정한 선거인 2000년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모든 국제 지원을 중단시켜 정부 국고를 파산시키려 했다.
심지어 미국 정부는 미주개발은행이 이미 지원하기로 합의한 대출금의 지급을 중단시켰다.
그 결과 아리스티드 정부의 예산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국내총생산(GDP)도 폭락했다. 아이티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아리스티드 정부는 약해졌다.
1990년 이후 정부 기관에 의미있는 투자를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정부가 경제를 관리하거나 자연재해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이티에 제공된 지원금은 대부분 NGO를 통해 전달됐다. NGO는 강력한 아이티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많은 NGO는 반동적인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아이티에 진출했다.
그 결과 1970년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복음교회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주된 목표는 해방신학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많은 NGO의 자금이 이들을 통해 지원됐다. 물론, 일부는 유용한 일을 했지만, 너무 소규모였고 서로 일을 조율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아이티인은 NGO들이 기생충 같다고 생각했다. NGO들은 오랫동안 아이티에 있었지만 빈곤이나 개발 문제에서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티의 문제를 악화시켰다. 지금 아이티는 대규모 국가 투자, 그리고 자국민과 자원의 대규모 동원이 필요하다.
2000년에 시작된 아리스티드에 대한 압력은 국제적 지원을 받는 노골적인 ‘정부 흔들기’ 캠페인으로 발전했다. 준군사 조직도 이 공격에 가담해 반란을 시작했다.
2004년 2월 28일 미국 정부는 한밤중에 아리스티드를 납치해 강제로 망명을 보냈다. 미국 정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부 중 하나를 제거했지만, 국제적 항의도 별로 없었고 심지어 쿠데타라는 비난도 없었다.
아리스티드의 민주 정부는 미국의 꼭두각시인 제라르 라토르튀로 대체됐다. 대규모 유엔 ‘안정화’군이 미군을 대신했다. 유엔군의 주된 임무는 아이티 대중을 통제하고 그들이 쿠데타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티드 지지자들을 상대로 한 저강도 전쟁이 시작됐다. 빈민 지역이 주된 표적이 됐다.
대중 운동은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아리스티드 지지자들은 재산과 법질서를 파괴하는 범죄자이자 갱단으로 취급 받았고, 이들의 정치는 무시됐다.
주류 언론은 아이티가 폭력이 난무하는 장소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이티의 범죄율은 대단히 낮다.
아이티의 지배자들은 이 나라가 반영구적인 ‘치안’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 논리로 거듭 선거를 연기해 왔다. 치안 위험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면 치안이 먼저 확립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엔 점령과 미국의 개입도 동일한 논리로 정당화된다.
물론 포르토프랭스처럼 대단히 가난한 도시에는 갱단들이 있다. 유엔군은 그중 일부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갱단이 애초에 등장한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다.
자기실현적 예언
사실, 성폭행을 포함해 유엔 자신이 범죄 행위를 저질러 왔다. 유엔군은 ‘안정’을 내세워 대단히 폭력적인 작전을 펴 왔다.
2005년과 2006년에 유엔군은 라발라스가족당 지지자들이 많은 정치적으로 각성한 주거지역인 시테 솔레이유에 침입했다.
유엔군 수백 명은 건물들이 주로 얇은 양철이나 마분지로 지어지고 인구밀도가 높은 이 지역에서 발포했고, 총알들은 벽들을 관통하며 누군가를 맞힐 때까지 날아다녔다. 두 번의 작전으로 각각 20~25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유엔은 또한 선거 과정을 감독했는데, 원래 다음달로 예정된 의회 선거에서 라발라스가족당이 출마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이것은 민주적 선거 절차라는 말을 무색케 하는 행위였다.
지금 유엔은 아이티에 9천 명의 군대와 경찰을 주둔시키고 1천~1천5백 명의 민간인 자문을 고용하고 있다. 여기에 매년 6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데, 대부분 유엔군 활동에 쓰인다.
그들은 장갑 차량을 타고 시내를 순찰하는 등 자신들이 마치 ‘적대국 영토’에 있는 듯이 행동한다.
그들은 수도, 병원, 오물 처리 등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는 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지진 발생 뒤에도 유엔은 본부 건물을 경비하며 가만히 있었다. 그들이 기본적인 수도 시설을 확충하지 않은 덕분에 지진의 피해가 더 커졌다.
물론, 이런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외부 지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는 누구보다 뛰어난 병참 자원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구호 노력은 갈수록 군사 침략과 비슷해지고 있다.
미군은 아이티 공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 뒤 미군 수송기를 착륙시키려고 인도주의 구호물자를 실은 비행기의 착륙을 불허했다. 또, 미군은 수색구출 작전을 시작하거나 물·식량·의약품을 분배하기 전에 자국 병사들이 먼저 배치돼야 한다고 고집한다.
미군은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 더미에 깔려 죽어 가는 동안 자국 병사들을 배치하는 데 더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미군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재앙을 겪은 뒤 자신을 나이팅게일로 포장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을 기뻐하고 있다.
많은 수의 미군 주둔은 아이티의 재건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전 세계적으로 재난이 발생한 곳에서 이득을 취해 온 ‘재난 자본가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나는 앞으로 민영화에 속도가 붙고 토지 소유 문제를 둘러싼 온갖 추문들이 터져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이미 다른 무엇보다 ‘치안’과 ‘안정’을 강조하고 있고, 아이티군을 재건하라는 압력이 더 강해질 것이다.
대다수의 정직한 언론인들은 재난의 와중에서도 아이티인들이 놀랄 만큼 침착하게 서로 돕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유엔과 미국 정부는 약탈과 폭동을 강조한다. 그들은 ‘소말리아 사태’가 재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경고는 곧 자기실현적 예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될수록 재건 활동은 아이티인들이 아니라 유엔 관료와 미군 사령관이 통제하는 군사 작전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될 것이다.
또, 재건이 진행되면서 ‘국제 사회의 감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고 공업 단지 엘리트들의 권력이 강화될 것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유엔 특사로 임명된 후 가장 공을 들인 것이 의류 산업에 대한 투자 확대였다. 다시 말해, 초착취 공장을 늘리는 것이었다.
재건 활동의 진정한 우선순위는 아이티인들이 조속히 자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돼야 한다.
대중 운동이 재개돼야 하며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열강에 대한 아이티의 종속을 심화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해야 한다.
불행히도, 나는 아이티의 재건 과정이 이라크와 비슷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아이티의 국가 재정은 너무 적다. 몇 년 전에 아이티 예산은 3억 달러 정도였다. 지난해에는 해외 지원 덕분에 9억 달러에 달했다. 만약 수십억 달러가 지원된다면 아이티에게는 엄청난 액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돈이 아이티인들의 힘을 강화하는 데 사용될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 다른 나라의 사업 후원자들과 연합한 아이티의 대가문과 기업 들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될 것인가?
나는 후자가 될 거라 생각한다. 그것을 막으려는 대중적 정치 운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출처 영국의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 | 번역 김용욱 기자
피터 홀워드는 미들섹스 대학 유럽철학 교수이자 《홍수를 막기: 아이티, 아리스티드와 봉쇄의 정치학》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