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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시아파가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

이라크 시아파가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

주디 콕스(영국 좌파 저널리스트)

최근 이슬람교의 시아파 신자들이 이라크 남부 도시 케르발라로 성지 순례를 한 사건에 미국 지배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열정의 과시가 아니었다. 우익 기독교 광신자인 조지 부시도 성지 순례 자체는 문제 삼지 않는다. 문제는 수십만 명이 미국의 점령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는 광경이었다.

이라크의 시아파 무슬림 사이에서 반미 감정이 널리 퍼지고 있다. 미군 해병대가 상륙하면 ‘해방’을 환영할 것이라던 바로 그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다.

시아파는 이슬람의 두 주요 분파 중 하나다. 이슬람교 신도의 다수는 수니파로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시아파는 이란, 이라크,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아제르바이잔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란에서 시아파는 전체 인구의 93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라크에서는 60퍼센트 정도이다.

서기 632년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직후에 그의 추종자들은 시아파와 수니파로 분열했다. 나중에 시아파가 된 추종자들은 아라비아의 부패한 족장들이 이슬람교를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아파는 알리를 추종했는데, 무함마드의 사위였던 알리는 예언자[무함마드] 자신과 긴밀히 협력했었다.

알리는 경쟁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 후세인도 680년 케르발라 인근 전투에서 압도적인 열세에도 투항을 거부하다 살해당했다.

시아파는 초기부터 이런 희생과 고통의 이미지라는 특징을 갖고 있었으며, 이것은 2주 전의 성지 순례에서도 재현됐다.

여느 종교처럼 시아파 이슬람교의 일부 가르침도 가난한 사람과 힘없는 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천 년의 세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시아파의 종교 사상은 이슬람 제국을 지배했던 수니파 아랍 지배자들이 누려 온 특권을 거부당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가 되곤 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시아파의 가르침 역시 부자들과 힘있는 자들을 옹호하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부자와 빈민의 화해를 설교하는 것이 바로 그런 메시지였다. 중세의 시아파 제국은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을 아우르고 있었다.

아야툴라 칭호를 가진 사람들이 이끈 한 시아파 교단이 부자와 빈민의 염원에 적합하게 모순적인 종교적 메시지를 해석했다. 그러면 그들과 경쟁하는 다른 아야툴라들도 자기들 나름의 추종자들을 확보했다.

혁명과 반동

오늘날 이라크로 알려진 지역의 가난한 농민 다수가 19세기에 시아파로 개종했다. 역사가 이츠하크 나카쉬는 “개종 행위 자체가 점증하는 빈부 격차에 대한 일종의 항의 행위, 특히 토지 귀족으로 변모한 수니파에 대한 항의 행위였다”고 말한다.

시아파 지도자들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한 농민들의 적대감을 대변했다. 그들은 서구 식민주의에도 반대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이라크를 침략하자 시아파 성직자들은 영국에 반대하는 종교 칙령을 발표했다.

거트루드 벨은 영국이 이라크에 세운 식민 정권의 핵심 인사였다. 그녀는 특히 시아파가 영국에 적대적이라면서, 그들을 “폭력적이고 통제할 수 없으며 광신적인 데다 보수적”이라고 묘사했다.

주민의 다수가 시아파였기 때문에 영국은 민주주의의 도입을 배제해 버렸다. 영국은 수니파 인사를 국왕으로 옹립했다. 이 때문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1920년에 시아파의 성지 나자프에서 시작된 반란은 시아파 성직자들이 신도들에게 영국에 저항하라고 촉구하면서 이라크 전역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반란은 결국 패배했고 시아파는 보복을 당했다. 그들은 정계 고위직과 공직, 군대에서 축출됐다.

그 뒤 이라크의 모든 정부는 시아파를 배제해 왔다. 사담 후세인이 나중에 시아파를 탄압한 것도 영국과 그 앞잡이들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다. 1979년 이웃 나라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왕정이 타도되고 시아파 지도자(아야툴라) 호메이니가 권좌에 오른 뒤에 후세인의 탄압은 강도를 더해 갔다.

이란과 부시

호메이니는 미국 제국주의에 쓰디쓴 패배를 안겼다. 그는 또 매우 보수적인 사회 정책들을 지지했다. “비이슬람적 행위” 금지, 여성의 복식 규정, 사회주의 조직 탄압 등등.

집권 18개월 만에 호메이니는 좌파 세력을 억누르고 이란 사회를 다시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란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기업인들은 새로운 이슬람주의 국가 관료들과 함께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 로버트 피스크가 말했듯이 이란 혁명은 중동에 새로운 “저항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레바논 인구 3백만 명의 약 40퍼센트가 시아파다. 이들은 대개가 극빈층이다. 레바논 내 주요 시아파 조직인 아말은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자 처음에는 이를 환영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레바논 내 다른 분파의 억압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미국의 잔학 행위 때문에 시아파 대중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조직을 지지하게 됐다. 2000년 헤즈볼라는 마침내 이스라엘군을 레바논에서 완전 철수시켰다.

오늘날 헤즈볼라와 이란 정권은 이라크의 많은 시아파 사이에서 신망을 얻고 있다.

미국은 친 이란 성향의 아야툴라들이 지지를 얻을까 봐 우려하고 있다. 미국은 변화를 겪고 있는 복잡한 이란 사회에 대해 엉터리로 날조한 얘기를 퍼뜨리면서 이란을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이란 지배자들의 보수적인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란 여성들이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 일부는 의회에도 진출해 있다.

미국은 이런 사회 변화로 이란 정권이 미국에 굴복하는 상황이 조성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이 지역에서 직면하고 있는 근본 문제는 단지 이란 정권의 시아파 이슬람만이 아니다. 자국 정권에 반대하는 이란인들은 대부분 미국에도 반대한다. 시아파의 기치를 들었든 안 들었든 다수 대중으로 하여금 미국에 저항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빈곤과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