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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의 성격

이 글은 필자가 7월 9일, 한 노동조합 활동가 그룹 앞에서 한 강연을 보완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철도 노조원들 수십 명을 구속·수배했고, 수천 명에게 징계를 내리려 한다. 전교조 교사들도 수백 명이 실질적 징계에 직면해 있다. 7월 8일 현재 노무현 정부에 의해 구속·수배된 노동자 수는 무려 78명이나 된다.

강금실은, 전두환 정부의 노동부 장관을 하면서 편 강경책 때문에 “최틀러”라는 별명을 얻은 한나라당 새 대표 최병렬로부터 “남자 장관 다 합친 것보다 낫다”는 칭찬을 들었다.

노무현은 변한 걸까 아니면 본색을 드러낸 걸까?

며칠 전 〈한겨레〉 보도는 노무현 정부가 성장 중시 정책으로 전환하는 듯하다며, 개혁의 후퇴를 우려했다. 그러나 이미 지난해 노무현은 “나는 분배주의자가 아니다” 하고 밝혔다.

또, 대선 때 그는 민주노동당의 부유세 공약에도 반대했다.

그밖에도,

▶ 대우차 노조 투쟁 때 부평 공장을 방문해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을 거부하는 사람들과는 대화할 수 없다.” 했다.

사실, 이번에 그가 철도노조에 보인 태도가 바로 이것이다.

1998년 현대차 파업 때도 노무현은 정리해고 수용을 요구했다.

▶ 지난해 말 촛불 시위 때 부시 직접 사과 요구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광화문 시위 참가도 거부했다 ― “정치 지도자가 시위와 서명에 참가한다는 것은 …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라며.

당선자 시절에는 제임스 켈리와 만나 “주한미군은 필요하고 앞으로도 필요할 것이다.” 했다.

▶ 또한 1월 9일 서울국제포럼 간담회 연설에서 “한미공조냐 민족공조냐를 나눌 생각이 없다. 나는 실용주의자다. … 한미동맹 관계를 바꿀 생각이 없다.” 했다.

▶ 자기에게 거의 유일한 희망을 걸고 찾아온 발전 노조 파업 참가자 가족들의 중재 요청을 거절했다 ― “공인이기 때문에 도와 줄 수 없다.”며.

또, 지난해 5월 20일 유럽연합 14개국 대사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공기업 민영화를 지지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조용히 식사를 하던 대사들은 이 발언이 나오자 일제히 수첩과 볼펜을 들고 필기하기 시작했다(〈시민의 신문〉).

▶ 지난해 말, 경제자유구역법에 찬성했다.

▶ 〈이코노미스트〉가 대선 후보를 대상으로 “기업관 및 경제철학 설문조사”를 했을 때 노무현의 답변은 “기업의 목적은 이윤 극대화이지, 부의 사회 환원이나 종업원 복지 향상은 아니다.”였다. 덧붙여, “이윤을 사회로 환원해 복지와 실업자 구제까지 할 필요는 없다.”

▶ “김종필과 제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아니라 “대체입법”을 약속했다. 국가보안법은 급진 좌파의 언론·출판·결사·집회를 억압하는 반민주악법인데, “대체입법”도 마찬가지다.

▶ “홍삼트리오 정국”에서 김대중 정권의 부패가 “과거의 치부형 권력형 비리와는 다르다”며 옹호했다.

김대중 정부의 검찰이 김대중 둘째 아들 김홍업에 대한 수사를 월드컵 대회 후로 늦추겠다고 했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사흘 만에 철회했을 때, 노무현은 “검찰이 민주당과 청와대만 몰아붙이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렇다면, 노무현은 변한 게 아니다. 본색이 이런 것이다. 이런 본색을 피억압 대중이 눈치채지 못했고, 그를 지지한 개량주의자들은 희망적 해석 때문에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노무현 정권의 ‘본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이다. 물론 서구처럼 발전한 단계의 것이 아니라 낮은 단계의 것이다.

전두환 군사 독재를 무너뜨리고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이룩한 것은 1987년 6∼9월 대투쟁 이래 비교적 꾸준히 성장해 온 노동자 운동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민주화의 동력이 노동 계급 조직임을 역설했다. 19세기 후반부 노동 계급의 자주적 조직 덕분에 보통선거권, 국가 기구가 의회에 책임을 지는 것, 시민적 자유권 등이 실현됐다.

그래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은 노동 계급 대중 조직”이라고 트로츠키는 강조했다. 달리 말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지배 계급이 조직 노동 계급의 세력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직 노동 계급을 국가의 정치 구조 안에 통합하는(“참여 정부” 또는 “노조의 경영 참여”) 자본주의 국가 형태라는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조직 노동 계급 통합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중재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다. ‘아슬아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와 자본들(핵심은 재벌)의 관계가 긴장돼 있어서 국가가 불안정하다. 자본 축적의 결과 자본가들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보다 더 부강해졌다. 경제가 성숙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자본가 계급도 다양해졌다. 이들은 더는 국가 관료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경제·정치 활동의 여지를 확대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규제 폐지나 민영화 등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지배 계급 내에서 갖가지 긴장과 이익 충돌이 벌어진다.

다른 한편, 국가와 자본들의 특별히 밀접한 관계(“정경 유착”) 때문에 부패 문제가 흔히 불거지곤 하는데, 이를 둘러싸고 때때로 심각한 정치 위기가 조성된다. 예컨대 굿모닝시티 추문을 주목하라.

둘째 이유는 한국 경제의 세계 시장 통합 증대로 빚어진 결과와 관계 있다.

▶ 미국과 그 밖의 선진국들은 한국 경제에 더한층의 개방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하고 있다.

▶ 또한 선진국들은 민영화와 경제 규제 폐지 압력을 증대시키고 있다.(조흥은행 파업은 1997년 말에 엄습한 금융 공황의 여파 속에서 사실상 국유화된 조흥은행을 민영화하라고 부시 정부가 방미중인 노무현을 압박한 직후에 일어났다.) 투자은행들 같은 서구 금융시장이 민영화 기업의 주식을 판다든지 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 1997년 말 금융 공황 이후에 미국인들의 투기적 투자 물결이 거대하게 밀려들었는데, 이러한 투자는 주로 주식 투자라는 형태를 취했다. 이것은 한국 경제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가령 지난 3월 말∼4월 초 주식 시장의 추락).

셋째, 노동 계급의 저항을 자본가들이 두려워한다. 권위주의적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경제적으로 강력해진 노동 계급이 성장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보통 그들은 고도로 착취당할 뿐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른바 ‘정상적인’ 권리도 상당수 누리지 못한다.(아직도 노동조합 결성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상당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경제적 불만과 정치적 불만이 결합된 폭발적인 투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1980년대 초 브라질, 1980년대 중반 남아공, 1987년과 1997년의 한국이 이러한 사례다.

넷째, 위의 세 가지 이유로 지배 계급이 내분해 있고 일관되지 못하다.

노동자 운동이 밑에서부터 가하는 압력에 밀려 노무현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계속 헌신한다 해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의 한 형태”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지적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조흥은행노조·철도노조·전교조에 대한 탄압 등 지금 노무현이 보이고 있는 탄압 행태는 명백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포퓰리즘적 개량주의

노무현의 본색이 개량주의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노무현의 정책이 아무리 우파적일지라도 그의 지지 기반 가운데 일부가 우리 운동의 일부이기도 하다면 그 부분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특별한 방식이 필요하다.

노무현 팀(청와대)의 개량주의는 다른 신흥공업국 개량주의와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포퓰리즘은 ‘평범한 국민의 이익과 의견 증진을 표방하는 정치’라고 일단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는 출발점으로서는 그런 대로 괜찮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소가 추가돼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계급 연합이라는 측면이다. 즉, 노무현의 사회적 기반은 다계급적(多階級的)이다. 부르주아지(자본가 계급과 상층 중간 계급)의 자유주의적 일부와 자유주의적-포퓰리즘적 중간 계급 지식인들과 주요 시민단체 지도자들, 그리고 노동조합 일부 상근 간부(지도자)들이 그 주요 구성 부분들이다.

노무현의 노조 상근 간부 기반은 김금수·이원보·김영대·박태주 씨 등의 경우처럼 직접적 연계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민변이나 여성단체연합 등 온건 시민단체 지도자들의 정치적 중개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개혁국민정당(독일사민당 강령을 그대로 본떴음을 자부한다)이나 노사모 등의 중개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개혁당의 유시민 씨는 1985년 여름 서노련 내에서 주체사상을 강력히 옹호한 바 있는 1980년대의 주요 노동운동가였다. 개혁당 사무총장 홍영표는 전설적인 1985년 봄 대우차 파업의 주도자였다. 그리고 우리는 개혁당과 노사모가 지난 3∼4월 반전 가두 시위 때 우리와 나란히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1998년 김대중 취임 첫 해에 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가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노무현의 이런 노동계 기반 덕분에 그는 철도파업 전까지 이럭저럭 민주노총 지도자들을 달랠 수 있었다. 물론 일정한 양보가 있었다. 그리고 조흥은행이나 화물연대처럼 민주노총과 관계가 없거나 적은 부문에 대한 통제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노무현의 이런 밀접한 노동계 연관을 무시해선 안 된다. 서구의 (조직된) 사회민주주의를 모형으로 순수한 형태만을 상정해선 안 된다. 미조직의 무정형도 있다. 이런 경우 개인들이 큰 역할을 한다.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은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타협 조건을 놓고 협상하는 사회 계층이고, 이 노조 상근 간부층의 정치적 표현이 바로 사회민주주의이다. 바꿔 말하면,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은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해 둬야 한다. 사회민주주의 정당(가령 영국 노동당, 독일 사회민주당, 프랑스 사회당 등)은 일반 노동자 대중의 통제를 받는다는 의미의 노동자 정당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사회적 토대는 현장 노동자 대중이 아니라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이다.

노조 상근 간부층은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 둘을 결속시키려 하기 때문에 기존 사회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완전히 전복하는 것 사이의 타협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고무하고 강화한다. 사회민주주의는 그러한 타협안을 제시한다.

사회민주주의는 개량주의의 전형(典型)이다. 바꿔 말하면, 개량주의의 전형은 사회민주주의이다. 하지만 변형(變形)들까지 포함하면 개량주의는 (조직된) 사회민주주의 정당보다 더 광범한 현상이다. 이것은 미국의 경우에 오랫동안 들어맞는다. 미국에서는 노동조합 내 개량주의가 많은 노동자들을 의문의 여지 없이 명백한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에 묶어 두는 데 일조했다.

전투적 대중 운동 속에서조차 개량주의의 여러 변형들이 발전할 수 있다. 이는 프랑스 반자본주의 운동 안에서 매우 분명하다. 프랑스 ATTAC(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은 운동 안에서 갈수록 명확한 우파로 떠올랐다. ATTAC은 국민 국가 강화, 유럽연합 개혁, 부시의 전쟁 몰이 반대를 위한 동원 기피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악폐를 제거하려 애썼다. 노동 계급이 혁명적 의식에 자동으로 끌리지 않는다면 더 느슨하고 더 무정형(無定形)의 사회 운동이 그럴 까닭은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게다가 개량주의 의식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존재하지 않을 때도 존재할 수 있다.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점진적 개선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으로서 개량주의는 자본주의 하 노동 계급의 물질적 조건에서 비롯한다. 특히 이 조건들(자본주의 경제가 조장하는 파편화와 수동성) 때문에 노동자들은 투쟁하고 있을 때조차 자신들이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자신감 결여는 계급 투쟁 상의 지구전(持久戰)을 겪고 이에 조직된 변혁운동가들이 능동적으로 개입함으로써만 타개할 수 있다. 개량주의를 패퇴시키는 일은 자동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모순

노무현의 기반이 다계급적(多階級的)이니만큼 경제 위기가 심화해 계급 양극화(빈부격차)와 정치 양극화(좌우대결)가 심화하면 노무현의 기반 내에서 분열이 일어날 것이다.

그 때 노무현과 그의 노동 계급 기반이 서로 결별하면서, 좀더 좌파적이고 형태가 사회민주주의(조직된)와 좀더 흡사한 개량주의가 새로 탄생할 것 같다.

개량주의의 모순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자들이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자들이 진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개량주의가 직면하는 본질적인 문제다.

우리가 국회의원을 뽑고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을 직접 뽑는다고 하지만, 판검사나 경찰간부도 뽑는가? 군장성도 뽑는가? 언론사주들을 뽑는가? 실제로 정책 입안을 하곤 하는 고급 공무원들을 뽑는가? 흔히 이 사람들이 국회의원보다 실질 권력이 더 크다. 하지만 이들은 위로부터, 국가 관료 내부에서 임명된다.

경제 분야의 경우는 더 명백하다. 우리가 재벌 총수를 선출하는가? 기업 최고경영자를 선출하는가? 직장 상사를 선출하는가? 하지만 이들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린다. 투자, 고용, 해고, 작업 방식, 작업 규율 등등을 결정한다. 우리는 이들 때문에 한순간에 쪽박을 차는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는 이들의 지배가 “전제적(專制的)”이라고 했다. 또, 이 때문에 마르크스와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본질은 부르주아 독재라고 했다.

우리는 노무현과 개혁파 국회의원들을 선출했고, 그들은 곧 개혁 신당으로 통합할 것 같은데, 문제는 개혁을 하려 해도 진정한 권력이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곳에 ― 특히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본가들에게 ―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4월 초 파병안 통과 직전의 주가 폭락을 일으킨 자본의 해외 유출은 노무현에게 큰 압력이 됐다.

이를 좀더 분명히 인식하기 위해 개량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돌아보자. 비교적 근래의 것을 살펴보자. 1970년대 중엽부터 시작된 위기의 시기에 서구에서 여러 차례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흔히 위기의 시기에 노동자들이 분노하고 사용자들이 두려워해, 개량주의 정당이 집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 두 가지 전형적 사례만 들겠다. 1974∼79년 영국 노동당 정부 경험과 1981∼95년 미테랑 하의 프랑스 사회당 정부 경험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들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매우 좌파적인 강령과 함께 집권했다. 이는 위기의 첨예함과 노동계급의 급진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량주의자들은 금융시장의 엄청난 압력 때문에 이 강령을 실행할 수 없었다.

가령 1976년 가을 영국 노동당 정부는 엄청난 외화 유출에 직면해 IMF(국제통화기금)에 도움을 요청했다. IMF는 공공지출의 대폭 삭감을 융자 조건으로 내세웠다. 결국 제임스 캘러한 노동당 정부는 IMF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 노동당 정부는 1979년 마거릿 대처 집권 후 그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처보다 먼저 실행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실제로 시작됐던 것은 1976년 노동당 정부 하에서였다.

프랑스에서는 20년 이상 우파 정부가 통치한 후에 미테랑이 집권했다. 그는 광범한 은행·대기업 국유화 같은 좌파 강령을 실행했다. 그 결과는 프랑스 자본의 대량 해외 유출과, 외환시장에서 프랑 화에 대한 엄청난 압력이었다.

결국 1983년 미테랑은 진로를 바꿔, 자신의 정책을 포기했다. 그는 “강력한 프랑 화” 정책을 채택했다. 프랑 화를 독일 마르크 화에 연동시킴으로써 금융시장을 안도케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실업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됐다. 이런 열악한 경제 사정을 배경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나찌인 국민전선이 성장할 수 있었다.

스페인·오스트레일리아·그리스·뉴질랜드 등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신흥공업국들인 남아공과 브라질의 경우 각각 아프리카민족회의-남아공공산당과 노동자당은 집권 초창기부터 아예 진지한 개혁 시도도 해 보지 않고 오히려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있다(“개량 없는 개량주의”).

그래서 〈조선일보〉(7월 7일치)는 룰라가 장하게도(?) “포퓰리즘을 포기했다”며, 노무현도 본받으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룰라가 집권 초부터 개량을 포기하고 보수적 정책들을 추진하는 것이 바로 포퓰리즘(계급 연합)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노무현이 지지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모순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개량 없는 개량주의”, 즉 개량주의의 포기가 개량주의의 죽음을 뜻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앞에서 내가 강조했듯이 개량주의의의 뿌리는 노동자 투쟁의 자기 제한적 경향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자신감이 충분하지 못하고 변혁적 정당을 갖고 있지 못하는 동안은 개량주의는 계속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1960년대 말 영국에서 노동당은 특히 전투적인 청년 노동자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엽에 최고조에 달한 노동자 투쟁의 물결이 지난 뒤에 좌파 사회민주주의가 소생했다. 토니 벤이 전투적 노동자들의 정치적 대표로 자리잡았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그는 노동당 내 좌파에서 대규모 운동을 지도했다. 전에 혁명가였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운동에 이끌렸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의 실패(이것은 경제가 지지부진한은 예정돼 있다)가 좌파 개량주의(이번에는 아마 민주노동당이 포함되는)의 부흥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가능한 얘기이다.

운동 내 개량주의

노동 운동 내 개량주의는 자유주의적 지식인들(교수·변호사·성직자·문인 등)을 매개자로 해 자본가 계급의 자유주의적 소수파 정치인들과 동맹하는 포퓰리즘의 형태를 취한다.

계급 협력 정치로서 포퓰리즘은 개량주의의 한 형태이므로 지배 계급에 의해 이용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전임 정부와 가장 두드러지게 다른 김대중의 통치 전략이었다. 이전 정부의 대북 정책은 좌파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얻었다 해도 김영삼이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송환하고 겨우 1년 동안 누린 환상처럼 일시적이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집권 기간 대부분 동안에 진보 진영 내 포퓰리스트들 사이에서 환상을 자아냈다. 이 개량주의적 환상을 이용해 김대중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탄압할 수 있었다. 남북 정상회담의 여파 속에서 일어난 롯데 호텔 노조와 사회보험노조 탄압을 떠올릴 수 있다.

포퓰리스트들은 김대중이 북한에 화해적이고 협력적인 정책을 추구하려 애쓰는 듯하다 해서 그를 공격하는 것을 기피해 왔다. 김대중은 이를 이용해 투쟁 노동자들과 진보 진영의 (포퓰리스트) 다수파를 이간함으로써 노동자 투쟁을 억제하려 해 왔다(앞의 사례).

비슷한 사태가 2001년 7월에도 재연됐다. 그러나 전해와 달리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투쟁을 중단했다. 민주노총 안팎의 포퓰리스트들이 민주노총 지도부에 압력을 가해, 8월 평양 방문을 앞두고 괜시리 말썽피우지 못하도록, 정부가 물러설 때까지 끝까지 싸우지 못하도록 싸움을 말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들은 정부와 공동으로 민화협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이렇게밖에 처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의 최근 사례는 노무현 지지를 위해 일부 좌파 포퓰리스트들이 대선 바로 며칠 전에 발표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사퇴 촉구 성명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남북 화해가 계급 투쟁에 선행해야 한다.

이것은 스탈린주의의 2단계 변혁 이론과 민중전선(국민 연합) 전략의 유산이다. 스탈린주의의 변혁 단계 이론에 따르면 민족 해방(스탈린주의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민족 해방은 민족 통일을 뜻한다)이 먼저 오고 사회주의적 변혁은 그 다음에 와야 한다.

민중전선(국민 연합)은 1934년 중엽 이후 스탈린이 추진한 정책으로, 파시즘에 반대해 부르주아 정치세력까지 포함한 모든 ‘민주’ 세력의 대연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1936년 스페인과 프랑스의 민중전선 정부들의 경험에서 보듯, 부르주아 정당과 동맹하는 정책은 노동 계급이 반동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킨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앞서 언급한 2001년 7월 상황에서 힐끗 볼 수 있었다.

스탈린주의의 유산을 물려받은 일부 포퓰리스트 좌파는 민중전선 전략에 따라 민족 화합적 자본가들과 냉전적 자본가들을 구별한다. 놀랍게도, 죽은 정주영과 도망중인 김우중이 민족 화합적 자본가에 포함된다. 현대와 대우가 북한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주영이 죽었을 때 범청학련은 조문을 하기까지 했다. 이런 종류의 자본가들과 동맹함으로써 이회창과 〈조선일보〉 같은 냉전 우익에 대항하려 함에 따라 스탈린주의 지지자들은 노동자 투쟁을 외면하고 때로는 2001년 7월에 그랬던 것처럼 파업도 단념시켜야 한다.

맺음말

개량주의가 조직된 형태로든 미조직적 형태로든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은 두 가지 중요한 정치적 함의가 있다.

첫째, 투쟁적 노동 운동가들의 주요 전술적 과제는 노무현의 (다계급[多階級] 기반 가운데) 노동 계급쪽 기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초창기(1921∼24년) 코민테른이 내놓은 공동전선 전술이 유용하다.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공유할 수 있는 요구들과 조직 형태에 바탕을 두고 공동 실천을 경험해야 현재 개량주의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변혁적 강령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둘째,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시기에 그은 개량과 변혁의 고전적 구분은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역사 과정이 개량주의를 자동으로 제거해 주지 않는다면 정치적 개입과 주장이 있어야만 개량주의의 ― 조직 노동 계급 운동 속에 있는 개량주의든 아니면 반(反) 신자유주의세계화 운동과 반전 운동 안에 있는 개량주의든 ―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개량주의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노동자들에게 제공하기를 염원하는 정치 활동가들이라면 강령과 실천이 개량주의에 대한 변혁적 비판에 바탕을 둘 때만 비로소 그렇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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