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 건강보험 보장성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보험료 인상 않고 보장성 강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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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레프트21〉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송홍석 회원이 기고한 글(‘보험료 인상을 무기로 싸우겠다고?’)에 대해 같은 단체 회원인 김종명 씨가 반론을 보내 왔다. 그리고 〈레프트21〉 기자 장호종이 김종명의 반론에 재반론을 폈다. 복지국가 논의가 점차 활발하게 벌어지는 지금 그 실현 방식을 둘러싼 논쟁이 운동에, 그리고 〈레프트21〉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대체로 보건의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보장성 강화’에 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달해야 할 목표는 대체로 공유한다. 하지만 그 목표의 구체적 상은 조금씩 다르다.
‘어떤 목표’를 쟁취해야 하는가에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데 반해, 그 목표를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해선 입장이 다른 경우가 많다. 과거 학생운동 진영 내에서 소위 ‘정치노선’에 따라 이리저리 조직이 갈라지게 된 것도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장성 강화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난 이 운동에 대한 논의와 고민이 좀더 깊어져야 하고 치열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험료 인상을 무기로 싸우겠다고?”의 글에 대한 비판글을 써야겠다는 것도 서로 의견 차이의 접점을 확인하고 서로가 공유 지점을 넓혀 나가야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래도 차이가 나는 지점은 서로가 바라는 방식의 실천을 통해 검증돼야 할 부분일 것이다.
어떻게 재정 확보할 것인가
획기적 보장성 강화에 대한 방법론적 측면에 비판을 하기에 앞서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가일 것이다. 제도적으로는 현행 건강보험제도(국고지원율이 다르더라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 그렇다면 건강보험을 어떻게 튼튼하게 만들 것인가? 그 핵심은 의료비를 모두 건강보험으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보험재정을 확충하는 것이다. 또 재정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을 줄이는 다양한 규제 장치를 두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를 준비하는 모임은 획기적인 보장성 강화를 위해 재정 마련에 대한 입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에 대해선 대체로 동의한다. 그런데, 재정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입장이 다르다. 나는 보험료 문제에 대한 입장 없이 어떻게 재정을 확충할 것인지 의문이 든다.
보험료 인상에 왜 다들 주저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국가와 기업은 더 내지 말고 우리 국민만 더 내자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현행 건강보험제도는 국가가 20퍼센트, 사용자가 노동자의 50퍼센트를 내주고 있다. 만일 모든 의료비를 건강보험으로 해결하기 위해 국민들이 매월 1만 1천 원씩을 더 내면(연간 6조 2천억 원에 해당) 사용자가 3조 6천억 원을, 국가가 2조 7천억 원을 더 내는 구조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마련된 12조 원은 전부 국민에게 돌아간다.
이런 구조에서 국민들이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해 보험료를 더 내자고 한다면 실제 팔을 걷어붙이고 반대해야 할 곳은 노동자가 내는 만큼 더 내야 할 자본과 기획재정부일 것이다. 또, 취약한 건강보험 덕택에 자신의 시장을 확대해 가고 있는 보험자본일 것이다. 건강보험이 튼튼해지면 민영보험회사의 주가는 폭락할 것이다.
즉,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운동은 결국 자본과 크게 한판 붙게 돼 있다. 보장성 강화 운동을 하게 되면 오바마의 의료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반발보다 훨씬 큰 자본의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물론 일각에선 보험료 인상으로 확충된 재정이 보장성 강화가 아니라 수가 인상에 쓰일 것이라고 우려한다. 난, 그것이 그냥 우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지금처럼 의료비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가 감히 대폭적인 수가 인상을 해 줄 수 있을까? 국민들이 보험료를 조금이라도 더 내서 건강보험을 튼실하게 만들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와중에?
지금도 친의료계 정권인 이명박 정부가 과연 얼마나 의료계에 잘해 주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명박이라고 하더라도 국민들 호주머니 돈을 고스란히 의료계에 퍼주는 일은 못한다(만일 보장성이 강화된다면 그때는 자본과 한판 싸움에서 국민들이 승리한 이후다). 따라서 우려에 지나지 않는 예상으로 현실의 중요한 운동 과제를 실천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보장성 강화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가?
난 이 표현을 보고 좀 놀랐다. 재원을 확충해 보장성을 강화하는 것이 왜 대형병원의 마르지 않는 이윤 창출의 샘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자. 대체로 보험수가가 저수가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는가. 경영난에 허덕이는 중소병원이나 공공병원, 나름대로 자신의 업무에 착실한 녹색병원 같은 비영리병원과 삼성병원이나 아산병원 같은 재벌병원의 경영구조의 차이를 보자.
전자는 경영난에 허덕이는 반면, 후자는 서로 일등이 되기 위해 수백 수천억 원씩을 쏟아 붓는다. 그러고도 많이 남는다. 왜? 비급여 때문이다.
양자의 경영난의 차이는 비급여 영역을 마음대로 창출하고 마음대로 높게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병원과 비급여 영역이 제한된 병원간의 차이일 뿐이다. 행위별수가제를 악용한 과잉진료는 보험영역의 저수가를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비급여를 통해 맘껏 수익을 즐기고 있다.
대형병원의 마르지 않는 돈줄은 보험 영역이 아니라 비급여 영역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게 되면 수가에 대한 정부 통제력이 증가돼 오히려 대형병원의 이익 창출 수단이 사라지는 효과가 생긴다. 보장성 강화를 하게 되면 대형병원 배불려 줄 것이라는 판단은 커다란 착각에 불과하다.
다른 한편 포괄수가제에 대한 문제제기도 동의하기 어렵다. 포괄수가제가 건강보험 지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편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포괄수가제처럼 간편하고 합리적인 제도는 없다. 그것은 마치 동네의원기관에 행위별수가제가 아니라 인두제에 기반한 주치의제도가 훨씬 합리적 지불제도인 것과 같다.
지금도 맹장 치료는 병원마다 가격 차이가 두 배 이상 난다. 이게 이상한 거다. 포괄수가제는 맹장 치료 가격을 균등하게 할 수 있는 제도다.
나는 진보진영이 획기적 보장성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험료 인상? 쿨 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에게 결코 손해가 아니다. 오히려 지불 능력만큼 돈을 내고 필요한 만큼 진료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제도다.
물론 나는 보장성 강화 운동에 이 방법만이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는 않다. 여러 방안 중 하나다. 그러나, 지금 한국적 보건의료의 현실에서는 가장 유력하고 가장 현실적인 안이라고 생각한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취약한 데 분노해 수백만 국민 대중이 갑자기 길거리로 촛불을 들고 나와 국가를 전복할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러나, 역사를 모두 우연에서 찾고 우연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을 바꿔 나가기 위해서는 의외로 치밀한 정책과 전술을 동반할 필요가 있다. 정책 없이 정치만으로, 또는 정치 없이 정책만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난 진보진영이 그 둘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해하고 현실을 바꿔 나가는 데 일조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지금 상황은 의외로 심각하다. 건강보험을 이 상태로 놔두면 영리병원을 저지해도, 유헬스와 당연지정제 폐지 모두 저지해도 의료는 민영화된다. 이대로 놔두면 건강보험이 고사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보장성을 현 수준으로라도 유지하려면 현실적으로 보험료 인상을 거부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