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이안지영·정원 님의 편지에 대한 답변
〈노동자 연대〉 구독
우선, 〈레프트21〉 기사에 관심을 보이고 의견을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두 분 말씀대로, 그동안 여성단체·노동단체·좌파 등이 여성문제를 둘러싸고 함께 연대체를 운영해 본 경험이 거의 없고, 낙태 쟁점을 둘러싼 운동을 펼친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안을 두고도 이해가 다를 수 있고, 여러 문제를 두고 이견이 있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앞으로도 ‘임신·출산 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 참가단체들 사이에 더 많은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의 편지와 제 답변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낙태단속 반대 운동이 성장하기 위해 여러 이견에도 불구하고 설득과 조율을 통해 다양한 진보적 세력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두 분 주장의 취지에는 적극 공감합니다.
제가 〈레프트21〉 30호 ‘낙태단속 반대 운동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기사에서 지난 네트워크 회의 내용을 언급한 이유도 네트워크의 결속을 위해서였습니다.
저 자신이 지난해 11월에 낙태 대응모임을 제안하고 여성단체·노동단체·좌파 등이 함께 대응하자고 적극 제안했기 때문에 네트워크의 존속과 발전을 바라는 마음이 큽니다.
저는 네트워크 내 협력이 강화되길 바란다는 두 분의 주장을 적극 지지합니다. 다만, 서로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왜 지난 네트워크 회의에서 문제의식을 느꼈는지 얘기하고자 합니다.
두 분은 ‘가부장제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 단체와 함께하기 어렵다’는 식의 발언이 나온 것은 부정하지 않으셨으나, 그것이 곧 “가부장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함께 할 수 없다는 폭력적 제안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선, 저는 두 분이 가부장제 이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네트워크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통점입니다.
또, 저는 제 기사에서 지적한 분들도 가부장제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 단체를 네트워크에서 배제하려는 의식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부장제 이론에 이견이 있어도 얼마든지 함께 낙태단속 반대 운동을 건설할 수 있음에도, 가부장제 이론 동의 여부 문제가 지난 네트워크 회의에서 꽤 오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쪽 참여자 중 한 분은 “낙태를 가부장제의 문제로 볼 것인지 자본주의의 문제로 볼 것인지 등에 대해 입장 차이가 있었는데 … [이런] 입장차이가 있는데 네트워크를 강화해서 가져갈 필요에 대해서는 회의적”, “가부장제에 대한 다함께의 이견이 있었[는데] … 이런 이야기까지 하면서 굳이 연대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다]”(4월 8일 회의 속기록에서 인용)고 했습니다.
이런 발언을 듣는 제 입장에서는 제가 가부장제 이론에 이견이 있다는 사실이 곧 네트워크에서 연대를 강화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뜻으로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당시 ‘가부장제 얘기는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분들도 특정 이론에 대한 이견을 문제 삼는 방식이 네트워크의 결속에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레프트21〉 30호 기사에서 이 문제를 지적한 이유는 앞으로 낙태단속 반대 운동이 더 폭넓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운동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부장제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거나 가부장제 이론에 동의하지 않아도 낙태단속 반대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이 가부장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환영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명서 작성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낙태단속에 반대하는 성명서 초안에서 “가부장제 구절을 삭제하거나 ‘여성차별적 체제’로 수정”하자고 제안했지만, 제 의견이 받아들여져야만 성명서에 연명할 수 있다고 고집한 적은 없습니다.
‘가부장제’라는 표현에 대한 이견은 있었지만, 낙태단속 반대 운동이 첫 발을 뗀 상황에서 힘을 모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성명서 초안 작성자에게도 얘기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최종 문안에 가부장제 구절이 남아 있었지만, 저는 최종 문안을 지지했습니다.
다만, 앞으로 공동 성명서를 작성할 때, 모두 동의하기 힘든 표현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네트워크의 결속에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두 분은 ‘그동안 여성운동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좌파들이 왜 낙태 문제에는 적극적이냐’는 몇몇 여성단체 활동가의 제기가 좌파를 문제 삼는 얘기였다기보다는 단지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서 흥미롭고, 이런 적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공유하고, 그 이유가 알고 싶다는 이야기”로 이해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회의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쪽 참여자 중 또 다른 한 분이 “여성단체와 좌파 단체들의 구성, 좋은 형태인지 의문”, “낙태 이슈가 가장 절실하다고 이 두 그룹이 모였을까 궁금하다”(4월 8일 회의 속기록에서 인용)고 얘기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좌파와 여성단체 두 그룹이 함께해서 흥미롭고 좋다는 맥락이 아니라 두 그룹이 함께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맥락 속에 있었습니다. 낙태단속 반대 운동에 대한 좌파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으로 들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발언은 이 운동에 열의를 갖고 참가하고 있는 저를 비롯한 좌파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이 발언 역시 좌파를 네트워크에서 배제하려는 의식적인 목적을 가진 발언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단결에 이롭지 않은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함께해 온 역사가 별로 없는 단체들끼리 모여 네트워크를 운영하다 보니, 서로 의사소통 과정에서 미숙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토론이 오가는 과정에서 서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