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렬 서울대 총학생회장 인터뷰 - 서울대 반전 운동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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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렬 서울대 총학생회장 인터뷰 - 서울대 반전 운동에서 배운다
Q 지난 4월 2일 서울대 학생들은 동맹 휴업을 하고 2천여 명이 행진해 국회 앞 반전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반전 동맹 휴업은 성공회대를 제외하곤 서울대에서만 성사됐는데, 어떻게 해서 동맹 휴업을 성사시켰습니까? 다른 학교에서는 “분위기가 안 뜬다.”라는 말이 많았는데, 서울대는 어떤 특수한 조건이 있었습니까?
A 일단은 반전 분위기가 있었고 아래로부터 학우들의 의지가 컸다는 게 첫번째 조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총학생회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제안했을 뿐 특별히 조직하지 않았어요. 어떤 면에서는 그러지 못했어요.
또, 총학생회의 골간 라인보다는 학내 반전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고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많았던 게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3월부터 학내에서 그런 얘기가 많았어요. 다른 학교와 어떻게 비교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저희 학교에서는 이전부터 학내 반전 활동을 끊임없이 했기 때문에 나중에 성과가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저나 총학생회 집행부가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단지 바라봤다는 것은 아닙니다. 동맹 휴업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설득의 과정일 수도 있고 알려나가는 작업일 수도 있습니다.
저나 다른 총학생회 집행부도 그렇고 다른 활동하시는 분들도 그랬지만, 거의 매일 수업 시간마다 [알리러 강의실에] 들어가다시피했거든요. 개강한 후에는 거의 매일 아침부터 홍보전 하고 강의실 선동하고 그랬는데, 이런 것들도 작은 노력이면 노력일 테죠.
“학우 대중이 사기가 꺾이고 정치 의식도 많이 떨어지고 개인주의화돼서 공부만 하려고 한다.”, “무슨 얘기를 한다 해도 사람들이 안 일어난다.” 이런 얘기가 많은데, 저는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해요.
분명 우리가 명분 있는 싸움을 하고 있는 건데, 다가가는 방법에서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조금만 더 고민하고, 조금만 더 우리가 다가서려 하고, 조금만 더 우리가 쉽게 얘기하려 하고, 조금만 더 성실하게 얘기하려 하면 분명히 분위기가 달라요.
예전에는 강의실 선동하면 사용하는 언어부터 거리감이 있고 약간은 계몽주의적으로 이야기하는 분도 있었는데, 내용은 동의하는데 그것을 담는 형식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총학생회장이 너무 학교에 많이 돌아다니지 말아라.” 하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밖에 집회 있으면 나가서 발언도 좀 하고 약간은 신비감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얘긴데요, 저는 많이 다르게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3월부터 [강의실에] 끊임없이 들어가서 얘기를 많이 하면 “그래야겠구나, 단 하루라도 내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구나” 하고 동의하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희는 동맹 휴업은 되게 오랫만에 했어요. 8~9년 만에 했는데 1995년 이후 처음일 거예요. 아크로 광장에 한 3천 명이 모였는데 그런 일도 없었어요. 저희는 올해를 계기로 해서 학생 사회의 정치 지형 변화까지는 너무 거창해도 많이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 자세들, 낮은 자세들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반전은 어떻게 보면 대학 안에서만의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외국은 2백만 명, 3백만 명씩 나왔잖아요? 우리 나라 같은 경우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해도 대학 안에서만 있던 목소리는 절대로 아니었죠. 학교 밖에서도 반전을 많이 얘기하고 그랬기 때문에, 당시 대학인들도 충분히 반전에 대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어요. 여러 가지 스펙트럼이 있긴 했죠. “나도 반전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파병은 좀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목소리도 있었어요. “반전·파병 반대 좋은데 그게 동맹 휴업이랑 무슨 상관 있냐? 나는 내 수업 받겠다. 나는 내 수업 들을 권리가 있다.” 그런 목소리 하나하나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우리의 취지를 알려나간 것들이 중요한 것 같아요. 총운영위원들도 정파를 떠나서 다 잘 해 주셨구요.
Q 반전 운동을 건설하면서 겪은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A 어려움은 저희가 4월 2일 국회 앞으로 행진한 날 파병동의안이 통과된 뒤부터 시작됐어요. 한총련 동맹 휴업이 4월 10일인가 그랬는데 비가 많이 오기도 했지만 많이 건설이 안 됐어요.
파병 동의안이 처리되면서 급속하게 반전 물결 자체가 쇠퇴하면서 학내에서도 반전 흐름을 만들어 가기가 어려웠고 실제로 집행 하시는 분들이 지쳤는데, 이런 것들이 가장 어려웠던 점들입니다.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정파 간에 분명히 관점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반핵에 대한 것이라든지 반미에 대한 것이라든지 그런 부분 때문에 힘이 잘 모아지지 않았던 점도 있죠.
반전과 파병동의안 반대 목소리를 낸 학우들이 많았는데, 애초에 동맹 휴업의 슬로건이 ‘전쟁 반대·파병 반대 서울대인 4·2 동맹 휴업’이었거든요. 파병동의안이 처리된 뒤 운동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지에 대해 굉장히 많은 의견의 스펙트럼이 존재했어요. NL 다르고 PD 다르고 그랬죠. 파병동의안 처리되기 전에는 정세상 함께 모여서 할 수 있었는데 그 뒤에는 머리 속이 굉장히 복잡해지면서 잘 모이지 않았죠.
Q 4월 2일 집회에 교수도 참가하신 것 같던데요.
A 저는 여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한 동맹 휴업은 서울대 학생이 아닌 서울대인의 동맹 휴업이었어요. 교수와 학생 들의 동맹 휴업이었는데, 물론 1천5백 명 교수 중에 나오신 분들은 20명밖에 안 되긴 했지만 그런 적이 없었어요. 역사상 처음이에요. 4·19 때나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교수랑 학생이 서울대에서 집회를 해 한 목소리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대학 안에 같이 공존하는 주체이므로 분명히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한 것은 분명 왜곡된 것이죠.
교육 정책이나 교육비 GDP 대비 7퍼센트 지켜 달라, 이런 것들을 똑같이 얘기할 수 있는데 학생들의 여러 상황과 또 교수 사회 안이 굉장히 보수적이고 해서 그 동안 뭉치지 못했어요.
저와 집행부 한 명은 강의실도 많이 돌아다녔지만 교수님도 많이 만나러 돌아다녔어요. 주요하게 민교협 분들과 교수협의회 분들 1백 명을 중점적으로 조직하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많이 왔고 대학 사회 안에서 교수와 학생이 같은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굉장히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후에도 그런 분위기가 이어졌어요. 저희 학교에는 김민수 선생님 문제가 있잖아요. 저도 예전에 대책위 했는데 그 때는 따로따로 존재했어요. 교수들은 교수대로 얘기하고 학생들은 학생대책위대로 얘기하고 총학생회는 총학생회대로 얘기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4월 2일 딱 한 달 뒤인 5월 2일 김민수 교수님 문제 관련해서 학생과 교수가 공동 집회를 했어요. 그리고 급기야는 종강 집회를 같이 했어요. 같이 한다고 해도 학생들이 1백 명쯤 되고 교수님 한 12명쯤 계셨지만 굉장히 의미있는 작업이었어요. 그 때는 또 기성 회비 관련해서 학내 민주화도 얘기했는데, 이런 것도 4월 2일 이후의 성과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4월 2일 동맹 휴업이 끼친 또다른 영향은 어떤 게 있습니까?
A 학생들의 자신감 부분일 수 있는데,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실 지금까지 학생 사회 내에서 학우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총학생회 사업이 많이 없었던 게 사실이예요. 동력을 책임감 있게 끌고 나가서 학우들과 많이 같이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잖아요?
총학생회뿐 아니라 학생 사회 스스로도 만약에 뜻이 맞고 그런 시기가 주어진다면 우리도 나서서 할 수 있고 같이 모여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의미 있는 작업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만약 동맹 휴업을 위한 총투표가 실패했더라면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해요. 동맹 휴업을 결의한 다른 학교에서는 총투표를 안 하고 동맹 휴업을 결의했는데, 저희들은 총운위 안에서 논란이 많았지만 [총투표가] 민주적인 의사결정 중 하나고 [반전 동맹 휴업이] 총투표로 결정할 만한 큰 이슈였고 기대가 컸던 문제이기 때문에 총투표를 했어요.
결과가 좋게 나와서 동맹 휴업을 좀더 힘있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고 학생 사회 내부적으로도 자신감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Q 반전 말고도 총학생회가 서울대에서 해 온 주요 활동은 어떤 게 있습니까?
A 반전, 축제, 학생회 선거 개혁, 총학생회 회칙 개정, 주요 국별 사업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전체 총학생회 운영 차원에서 본다면 학생회만이 해 왔던 일을 많이 떼냈어요.
저희들의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총학생회가 100퍼센트 정치 조직이 아니라는 것인데, 50퍼센트 정도는 행정 기구로서의 모습들을 띄어야 한다는 얘기들을 많이 했어요. 위원회를 많이 만들어서 위원회에 최대한 많은 권한을 주고 자율적으로 학우들을 참여하게 만들었어요. 대표적인 게 축제에요. 축제준비위원회에 1백 명 이상이 참여했어요.
총학생회 회칙 개정도 했는데, 총학생회 회칙 상에서나 운영 상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구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주로 개정했어요. 아래로만 수직적으로 내려가는 구조라든지 폐쇄성 등을 고치고 학우들의 참여를 단 1퍼센트라도 더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대학 사회에서 대학인들이 느끼는 바, 대학 민주화라든가 반전이라든가 하는 목소리를 총학생회가 담아 표출한 거죠.
총학생회 집행부는 아닌데 총학생회 일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축제위원회라든가 강의혁신위원회라든가 문화인큐베이터라든가, 집행부는 아니지만 총학생회 일을 같이 하고 있죠. 학생회가 더 힘을 받고 학생회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더 많이 노력해야 해요.
Q 서울대 총학생회가 9·27국제반전공동행동조직위원회에 가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학내에서 운동을 어떻게 건설할 계획인가요?
A 상황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학생들의 동력이 상반기에 비해 약화돼 있을 것이고 학생회 선거도 있구요. 외부 정세도 사람들이 반전에 대해 많이 잊어가고 있는 굉장히 안타까운 상황이니까 어떤 성과를 남길 수 있을지는 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해요.
일단 총운위에서 합의하고 총학생회에서 9·27 반전조직위에 가입하는 것을 결의했는데, 집행부에서 두 가지 얘기를 했어요. 하나는 9·27 때까지 흐름을 만들어 내고 그 이후에도 놓치지 않고 이어 나가는 작업을 하자.
두번째는 올해 반전 사업들이나 그 동안 잘못했던 부분들까지 정리해서 성과를 쭉 이어나갈 수 있는 작업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1학기 때 반전위 활동했던 분들과 함께 2학기 때 활동들도 계획을 해야겠지만 1학기 때 성과들을 정리와 더불어 고민을 하는, 전반적으로 올해 반전 운동을 평가하고 내년 총학생회나 그 후에도 계속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작업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학내 집회는 일단 개강 집회 때 당연히 반전에 대한 얘기가 나와야 할 거구요. 그 다음에 9·27 전에 한 번 집회를 할 생각입니다.
정진희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