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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를 넘어선 맑스》:
재앙을 낳은 자율주의 사상

안토니오 네그리는 사회당 소속 시 의원, 이탈리아 하원 의원, 파두아 대학 교수였다. 또한 그는 불명예스럽게도 테러 단체인 적색 여단의 지도자라는 혐의를 받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국가는 아무 증거가 없는데도 그를 망명자 신세로 만들었고 1980년대에는 수감했다.

네그리는 흥미 있는 역사적 인물 이상의 사람이다. 그의 사상과 그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은 1977년에 이탈리아 좌익을 지배했다. 그들은 이른바 ‘자율주의자들’로 알려진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사상도 ‘자율주의’로 알려졌다. 그래서 이 책은 자율주의 사상을 옹호하는 주장들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맑스를 넘어선 맑스》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책일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알뛰세르의 초청으로 네그리가 파리에서 했던 일련의 강연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흔히 《그룬트리쎄》(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라고 알려진 마르크스의 《자본》 집필용 메모를 살펴보면서 네그리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새롭고 신선한 통찰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 책이 난해하고 지루하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네그리나 그의 책을 번역하는 사람은 짧은 문장이나 쉽게 이해되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고역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할 생각은 내게 없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책을 읽어 보면, 몇 가지 핵심 사상이 두드러진다.

첫째, ‘사회적 노동자’라는 사상이다. 이 책이나 다른 책들에서 네그리는 사회 전체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공장이 사회가 되고 누구든지 ‘사회적 자본’에 의해 억압당하는 사람은 노동자 계급에 포함된다. 이 ‘사회적 노동자’는 학생일 수도 있고, 실업자일 수도 있고, 무직 청년일 수도 있다.

그는 국가를 ‘사회적 자본’으로 본다. 국가는 전능해서 노동조합, 공산당, 모든 사회 제도를 아우르는 강성 국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억압적 강성 국가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자율성을 누리고 있고 ‘사회적 노동자’ -- 그들이 학생이건 청년 실업자이건 노동자이건 ― 의 자생적 반란이 이탈리아 사회에 사회주의의 고립된 섬을 창출하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네그리는 경제 위기가 노동자 계급을 벌하는 수단으로 본다. 즉, 노동자들에게 일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자본은 노동자 계급의 일에 참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그리는 노동자 계급 투쟁의 정점이 노동 거부라고 본다.

‘노동 거부’는 급진적 학생이나 청년 실업자에게 조금 호소력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구호일 뿐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노동을 해야만 살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실업의 위협에 직면해 있을 때 그들에게 노동 거부를 호소하는 것은 진지한 태도가 아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생산 과정 속에서만 자본주의에 도전하고 마침내 자본주의를 변혁할 수 있는 집단적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 거부’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를 물리칠 수 있는 곳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1960년대 초 네그리와 일단의 좌익 지식인들은 《꽈데르니 로씨》(Quaderni Rossi : 붉은 공책)라는 정기 간행물을 중심으로 위와 같은 사상을 발전시켰다.

1960년대 말 이탈리아 사회에서 노동자 투쟁이 뜨겁게 달아오른 "길고 뜨거운 가을"에 그들의 사상은 반향을 얻을 수 있었다. 네그리와 그의 동료들의 사상의 강점은 노동자 계급 투쟁의 자생성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면 투쟁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한 세대의 활동가들한테 네그리와 그의 동료들의 사상은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1970년대 초에 이탈리아의 혁명적 좌익은 유럽에서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그 구성원들은 단체마다 수만 명은 됐을 것이다. 그들은 세 가지 일간지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1976년 말에 혁명적 좌익은 붕괴했다. 표면적 이유는 1976년 선거에서 극좌파에 대한 지지가 아주 빈약했다는 것이다. 더 깊은 진짜 이유가 있었다.

1976년 말 경제 위기가 심화하는 동시에 노동조합과 공산당이 노동자들을 저지하기 시작함에 따라 파업이 억제당했다. 몇 해 동안 행동과 투쟁이 멈추지 않고 일어난 뒤 노동자 계급 운동은 가라앉았다. 혁명적 좌익은 그 스탈린주의 정치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처할 수 없었다. 이것은 전투성의 위기를 낳아, 여러 해 동안 활동했던 사람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공장 투쟁과 더불어 운동의 성장이 있었다. 좌익 라디오 방송국 기금 모금 운동,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시위, 낙태 권리 옹호 운동, 대안적 문화 센터 설립 등의 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시위에 수많은 참가자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은 좌익을 강화시키기는커녕 좌익을 약화시켰다. 좌익 단체들은 노동자 계급만이 모든 피억압 집단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생각 없이 활동가들의 연합체가 됐다.

1977년 초쯤 좌익은 붕괴했으나 운동에 참여한 개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시에, 새로운 학생 운동이 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네그리가 내놓은 자율주의 사상이 학생 운동의 대세를 장악했다.

네그리 사상의 강점이 투쟁의 자생적 진출과 관계 있는 것이라면, 그 사상의 약점은 노동자 계급 투쟁이 가라앉았을 때 그러한 침체가 극단적 주의주의 ― 객관적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일부 개인들의 투쟁 노력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 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기들의 힘만으로 국가를 공격할 수 있다는 믿음은 네그리의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산당과 연계된 소수 노동자들의 불만과 학생 투쟁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도 없었다.

만일 ‘사회적 노동자’가 어느 곳에서든 자신의 자율적 영역에서 투쟁할 수 있다면,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해 집단적 합의에 이르고자 하는 정치 조직은 필요 없을 뿐 아니라 비난받을 뿐이다.

이로부터 적색 여단이 성장하는 지름길이 생겨났다.

좌익은 국가에 대항하는 폭력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 일말의 믿음을 언제나 갖고 있었다. 1977년 자율주의자들은 학생 시위로 위장해 경찰에 대한 무장 공격을 벌였다. 소수의 무장 행동이 대중 투쟁을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득세했다. 그 논리적 결론은 테러리즘이었다.

그러한 전략은 재앙이었다. 파업이 일시 중단됨에 따라 국가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탄압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산당이 좌익을 파괴자들이라고 묘사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좌익을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에 대한 대응은 극적인 것이었다.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고립당하고 국가에 의해 탄압당하는 자율주의자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단순히 활동을 포기하거나 했다. 혁명적 좌익은 겨우 몇 년 만에 사라졌다.

자율주의자들은 이제는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변해 버렸고, 단순히 문화 센터에나 관심을 가지고 있다. 네그리 같은 활동가들은 생활양식 정치나 녹색 정치로 후퇴했다. 그의 사상은 가장 커다란 혁명적 좌익과 한 세대의 활동가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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