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 칼럼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통치 이데올로기에서 저항의 사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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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중국에 처음 다녀왔다. 그 사이 중국을 가려면 몇 번 갈 수도 있었지만, 국가자본주의 중국에 별로 흥미가 당기지 않아서인지, 한 번도 가게 되지 않았다. 이번 방문은 상하이에만 3박 4일간 머무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꽤 소득이 있었다. 우선 필자가 참석한 마르크스주의 국제학술대회에서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최근 동향을 주마간산 격이라도 접할 수 있었다.
그동안 필자는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지배계급의 통치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최근 중국 대학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관련 과목들이 폐강되고 대신 MBA 경영학 과정이 인기를 끈다고 들어왔다. 하지만 필자는 이번에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면모를 접할 수 있었다.
우선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풀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계속 증가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예컨대 필자가 방문한 대학의 철학과에는 전임교수만 해도 50명이 넘었는데 그 대부분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전공하고 있었으며, 청년 대학원생들 다수도 마르크스주의 쪽으로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동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쏠렸다가 요즘은 신자유주의 대학 구조조정의 와중에서 존립의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 나라 대학 철학·인문학의 처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또 이 철학과 교수들은 마르크스를 베버, 루카치와 관련시키거나, 알튀세, 하버마스, 비데, 네그리, 바디우와 마르크스의 접점을 탐색하는 등, 마르크스주의를 자유분방하게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이들 다수는 초기 마르크스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소외론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완
적어도 이들은 중국 공산당의 교시, 즉 지배계급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하는 수단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사상 통제가 종전보다 크게 이완된 것으로 보였다. 예컨대 한 중국 철학 교수는 현재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이론과 자유정신의 추구를 본령으로 하는 마르크스 자신의 사상과 정반대로 몰이론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해 인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봉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공안’의 제지를 받지 않고도 발표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논문이 모든 중국 학술지에서 출판을 거절당했다는 그 교수의 폭로에서 보듯이, 중국 공산당의 출판 독점과 사상 검열은 아직 작동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는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 계급의 저항과 자기해방 사상으로서 본래의 위상을 회복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예컨대 중국 대학에서 철학과의 경우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이 주류이지만, 경제학과의 경우 헤게모니는 이미 미국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자들에게 넘어갔고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은 급속하게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는 우리 나라는 물론 대부분의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중국 공산당은 물질적 현실의 구체적 모순들을 다루는 경제학 혹은 경제분석의 영역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곧바로 자신들의 국가자본주의 지배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도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간파해,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가능한 한 철학 같은 추상적 관념의 영역에 제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술대회 한 참석자가 냉소적으로 풍자했듯이, “돈은 우리가 벌 터이니, 너희들은 공부나 해라”(번역하면 “경제(학)는 우리 지배계급이 알아서 할 터이니, 너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철학이나 해라”로 될 것이다)는 식이다.
실제로 올 봄 중국 전역에서 노동자 파업의 물결이 있었지만, 학술대회에서 이를 언급한 중국인 학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중국 국가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의 현실에서 유리되고 중국 공산당이 보장한 ‘마르크스학’(Marxology)의 영역에서 안온하게 철학을 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왕후이처럼 서방에는 꽤 반체제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중국의 이른바 ‘신좌파’들도 이와 같은 중국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상부구조 편향과 이와 관련된 개혁주의적 편향에 저항하기는커녕 이런 편향을 심화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 상당수는 이론을 논할 때는 상당히 자유분방하고 비판적이었다가 주제가 중국 현실로 돌아오면 갑자기 경직돼 변호론과 궤변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한 지도적 중국 철학자는 세계화에 관해 발표한 논문에서, 세계화에는 ‘나쁜 세계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좋은 세계화’도 있는데, 이번 상하이 엑스포를 계기로 중국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대신 조화와 호혜의 새로운 진보적 세계화를 주도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 토마스 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를 마르크스의 용어로 되풀이한 것으로서, 마르크스 사상을 왜곡하고 마르크스의 이름을 빌려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 사례였다.
오늘날 중국의 대다수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실생활에서도 보통 중국 노동자 계급과 현격히 괴리된 특권층의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현재 중국 대학 교수들 월급의 평균 수준은 중국 도시 노동자 월 평균 임금의 열 배에 이르는 약 1만 위안(약 2백만 원)이었다. 이는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마오쩌둥의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임금격차다.
이런 조건에서 중국 노동자들이 대체로 대학 교수로 종사하는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을 자신들의 벗으로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것 역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을 체제 내로 포섭하기 위한 중국 지배계급의 분할지배 공작의 결과라고 본다면 과잉해석일까?
변화
최근 중국은 2007~9년 세계경제 위기 국면에서 구사한 대규모 경기부양책의 효과가 소진되면서 경기가 다시 둔화되고 있다. 이 경우 올 봄 노동자 파업의 물결을 훨씬 뛰어넘는, 아마도 우리 나라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 전국적 노동자 투쟁이 분출할 수도 있다.
상하이 엑스포 전시장을 가득 메운 인파와 데이트할 곳이 없어 황포강변으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의 열망과 기대, 절망이 교차되는 눈빛에서 필자는 뭔가 큰 변화가 임박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중국 노동자 운동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반자본주의 혁명 운동으로 발전하려면 마르크스주의와의 결합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현재 중국 노동자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중국 공산당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공식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의 ‘신좌파’나 ‘마르크스학’ 연구자들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적대감이나 최소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중국의 기존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의 급진화를 통해서 극복될지, 혹은 노동자 대중 안에서 ‘유기적 지식인’의 출현이라는 방식으로 돌파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 운동의 결합이라는 화두를 놓고 수십 년 동안 씨름해 온 우리 나라 좌파의 경험은 중국 좌파에게도 유용한 시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