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북한에 대한 ‘인상주의적 비판’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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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3대 세습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크다. 북에 대한 비난을 제 정당함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 극우세력은 물론이거니와 상대적으로 중도적이거나 진보적인 이들도 3대 세습을 봉건왕조 운운하며 비난한다.
나는 물론 북한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을 비난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한 번쯤 톺아봐야 한다.
세습이 문제라고 한다. 봉건왕조의 모습이란다. 물어보자. 오늘날 한국의 소위 지도층인사들 중에 자신의 부와 지위를 자식들에게 ‘세습’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언론, 재계, 학계, 정계 할 것 없이 모두 제 새끼에게 권력과 부를 물려주는 걸 예사로 여긴다.
혹자는 남한의 기업은, (그것이 민족정론을 표방하는 족벌언론이든, 1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든), 제각기 별개의 사적 소유물이지만 북한의 권력기구는 사회를 지배하는 공적기관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엄한 소리 말아라. 오늘날 남한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청와대의 주인인가, 아니면 자본인가. 용산에서 철거민을 죽이고, 평택에서 노동자를 폭행한 것은 국가기관이지만, 그것으로 올라가는 것은 대통령의 인기도가 아니라 자본가의 이윤이다. 진정한 권력은 청와대나 국회 따위가 아닌 자본에게 있으며, 그 자본의 힘은 온전히 제 자손들에게 이양되는 중이다.
이런 우리가 북한의 세습을 비난할 수 있는가. 북의 세습과 독재를 거부하는 자들은 우리 사회의 세습과 독재를 자각해야 한다.
북한의 3대 세습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란다. 맞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의 인민들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미련하기 때문인가. 3대에 걸쳐 독재가 유지되는 일은 구성원의 자발적 동의없이 그저 위로부터의 폭압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수십 년에 걸친 외부로부터의 생존을 담보로 한 압박, 한때나마 봉건 지주와 일본 관리인으로부터 벗어나서 제 땅과 제 집의 주인이 돼 본 선대의 경험, 무엇보다도, 자신들과는 다르지만 자신들을 위협하는 세력과도 다른, 진정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인 사회가 존재함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북의 주민들이 북의 권력을 인정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진정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민주주의에 대해 진정으로 진지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곧 모든 사람이 “‘참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열망을 품고 그것을 위한 실천에 나서는 것, 하여 이 변태적인 자본주의 세계에 파열구를 내는 것이다. 그것만이 북한을 극복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북한을 무시무시한 괴물로 보던 시절과는 달리, 오늘날 북한에 대한 비난은 인상주의적 조롱이다. 그들의 상대적으로 궁핍한 경제력에 대한, 옹상한 외양에 대한, 혹은 그들 지도자의 영 패셔너블하지 못한 외모에 대한. 우리는 아프리카 오지의 원주민을 보듯, 제 동포를 보며 손가락질하는 것이다. “어떻게 저러고 살 수가 있담. 미련한 사람들.”
남한의 지배자들은 북한의 특수한 이미지에 세습, 독재, 반민주, 억압을 투영해 자신들의 세습, 독재, 반민주, 억압을 가린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북한 주민의 권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이다. 우리 사회의 변혁에 대한 성찰과 노력이 없는 북한에 대한 비난이란, 이런 지배자들에게 호응하는 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