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의 추악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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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의 추악한 역사
국제적 반전 여론에 부딪힌 부시는 유엔을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9월 23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부시는 “유엔은 이라크에서도 입헌 작업과 공직자 훈련,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실시 등에 관해 지원해야 한다.” 하고 말했다.
한국 지배자들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대표 최병렬은 “유엔 안보리 결의는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민주당 대표 박상천 역시 “미국이 유엔의 결의를 얻으면 파병하는 것이 옳다” 고 말했다.
파병 반대 견해를 밝힌 〈경향신문〉도 사설에서 “유엔이 이라크 전후 복구 권한을 행사한다면, 우리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민주화된 이라크의 재건을 위해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 일부도 이런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최근 〈한겨레〉 여론조사에서 미국의 요청에 의한 전투병 파병에는 57.5 퍼센트가 반대했지만, 유엔 다국적군 형태의 파병에는 51퍼센트가 찬성했다.
그러나 유엔 군복을 입어도 점령군은 점령군일 뿐이다.
1991년 걸프전을 승인해 25만 명의 이라크인들을 학살하고, 이후 13년간 경제 제재로 50만 명의 어린이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유엔이다.
최근 바그다드의 유엔 사무소에서 잇달아 폭탄 테러가 발생한 사실은 이라크인들이 유엔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유엔이 이라크 “재건”의 적임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유엔의 성격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유엔 창설 계획은 미국 국무부에서 나왔다. 유엔 창설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 재패 구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2차 대전 과정에서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국제 기구에 다른 국가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세계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싶어했다.
들러리
유엔은 초기부터 제국주의 강대국, 특히 미국의 입맛에 맞는 구실을 해 왔다.
유엔이 맨 처음 한 짓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토지를 강탈한 시온주의자 군대의 행위를 인정하고 이스라엘 국가를 승인한 것이다.
1961년 유엔은 콩고 최초의 민주 정부를 전복하고 민족주의 지도자 파트리스 루뭄바를 암살하려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계획에 협조했다.
1963년 미국은 베트남을, 1968년 옛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를, 1975년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같은 해 터키는 키프로스를, 그리고 1982년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지만 유엔은 이를 지켜만 보았다.
미국은 1961년부터 유엔 안보리만이 유엔의 모든 군사 행동을 허가하는 권한을 갖도록 만들었다. 1980년대에는 유엔에 대한 재정 지원을 끊는 등 갖은 협박을 가하면서 유엔을 통제했다.
유엔 다국적군은 사실상 유엔의 외피만 두를 뿐 미국이 지휘하는 침략군 연합이다.
반전 운동 세력 중 다수는 옳게도 유엔 다국적군에 한국이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 평화유지군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지금으로서는 거의 실현 가망성이 없지만).
그러나 다국적군에게도, 평화유지군에게도 이라크 “재건”을 맡겨선 안 된다. 그들은 이라크인들을 돕기는커녕, 이라크인들의 저항을 제압하러 이라크에 가는 것이다.
다국적군도, 평화유지군도 점령군이다
역사적 사례를 봐도, 유엔의 “인도주의적” 개입은 비극을 낳았다.
1980년대 후반 나미비아 민중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지역에 개입한 유엔은 나미비아 독립군인 남서아프리카인민기구(SWAPO)와 남아공 군대 모두에 휴전을 명령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감시 하에, SWAPO는 무장 해제당했고 남아공 군대는 2백여 명의 SWAPO 병사들을 학살했다.
1989년 나미비아 독립을 위한 총선 기간에 남아공 군대와 유엔군은 나미비아 민중이 독립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온갖 공갈·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1991년 앙골라 선거에서는 미국과 남아공이 지원하는 반군 앙골라민족동맹(UNITA)과 앙골라의 좌파 정부(MPLA)가 대결했다. 유엔은 선거 ‘감시’ 명목으로 앙골라에 개입했으나 실제로는 UNITA의 후보 조나스 사빔비를 후원했다. 사빔비는 선거에서 떨어지면 대학살극을 보여 주겠노라고 공공연히 협박을 일삼았다. 그는 약속을 지켜 1993년까지 1천 명을 학살했다. 유엔은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빈곤과 내전을 종식한다는 명분으로 1992년 소말리아에 파병된 유엔 평화유지군은 오히려 내전을 부추기고 소말리아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해 결국 소말리아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1995년 11월 미국이 중재한 데이튼 평화협정이 체결돼 30만 명의 보스니아인들이 사망한 보스니아 내전이 끝났다.
평화협정 뒤 유엔이 임명한 고등대표단이 보스니아를 위임 통치했다. 유엔 고등대표단은 제멋대로 법을 만들고, 선거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를 사퇴시키고, 정부 각료로 당선한 보스니아인들 중 비협조적인 인사들을 해임했다.
그래서 정부의 주요 자리는 모두 외국인들이 차지했다. 중앙은행장은 뉴질랜드인이었으며, 경찰부총장은 로스앤젤레스 경찰청에서 악랄하기로 유명했던 미국인이었다. 유엔은 보스니아에 평화가 아닌 친서방 독재정부를 수립했다.
1999년 미국이 지휘하는 나토 군대의 발칸반도 전쟁은 코소보 남부 지역의 알바니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종전 뒤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고 나서 알바니아인들은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을 고향에서 추방했다.
지금 코소보에는 세르비아인들이 5만 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 결국 코소보의 인종 비율은 역전되고 말았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종족간 내전을 전혀 끝내지 못했다.
이라크는 이라크인들의 손으로
이러한 비극의 역사가 이라크에서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터키는 미국의 뇌물에 힘입어 1만 명 파병을 미국에 통보했다. 터키군이 파병된다면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은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터키와 앙숙인 이란도 반발할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비극을 낳을지 모른다.
유엔은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없다. 앞의 사례에서 보듯 유엔은 불안정과 비극의 한 축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추진중인 결의안이 유엔에서 통과된다 해서 이라크 점령과 한국군 파병에 명분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만일 결의안이 거부된다 할지라도 유엔을 믿어서는 안 된다. 유엔은 미국의 의사를 거슬러 실질적 행동을 취할 아무런 힘도 없다.
한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