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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복 칼럼:
국제 협상의 역사에서 본 G20 정상회의

전후 세계경제의 기본틀을 확립하기 위한 협상이 1944년 미국 뉴햄프셔 주 브레턴우즈에서 벌어졌을 때, 케인스의 과제는 미국에게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쥐어 주지 않고 영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케인스는 영국이 겪고 있던 심각한 유동성 부족을 해결하는 것을 일차 목표로 ‘국제청산동맹’을 구상했다. 국제청산동맹은 일종의 세계 중앙은행을 창설하고 ‘방코’(국제 통화)를 통해 유동성이 부족한 나라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안이었다.

44개국 대표가 참석한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협상의 중심에는 당연히 미국과 영국이 서 있었다. 미국식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미국 대표 화이트와 이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인 영국 대표 케인스의 대립과 타협이 이 회의를 규정했다. 그럼에도 최종 합의는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한 미국과 이를 지켜보며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영국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이미 협상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소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후 세계경제 질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브레턴우즈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후 세계경제 질서와 관련한 협상은 미국의 입장이 거의 그대로 관철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74년 ‘G7의 탄생’이나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개선을 위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절상을 합의한 1985년 ‘플라자합의’, 엔고로 인한 버블 붕괴로 일본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자 엔저 유도를 합의한 1995년 ‘역플라자 합의’, 1997년 아시아의 외환위기 직후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국제 협력 필요성이 대두해 열린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등 국제 협상 대부분에서 미국은 주도권을 쥐고 협상을 자국에 유리하게 관철시켰다.

진앙지

그런데 2006년 하반기 이후 세계경제 위기는 새로운 국제 공조를 실험하는 역사적 장을 열었다. 미국에서 발생한 세계경제 위기로 세계경제는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고 국제 협력 없이 위기를 극복하기는 불가능했다. 가장 다급한 나라는 물론 미국이었다. 세계경제 위기의 진앙지이자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와 씨름하는 미국으로서는 국제 협력을 통한 위기 극복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G20 정상회의’를 국제 공조의 틀로 선택했다.

G20 정상회의는 브레턴우즈 회의 이후 세계경제에 필요한 국제 공조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회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브레턴우즈 회의 당시 미국의 헤게모니적 위치와 G20 정상회의에서 미국의 처지를 비교해 보면 차이점이 드러난다. 이제 미국은 변화하는 힘의 역관계 안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를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G20 정상회의는 지는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과 떠오르는 대안 헤게모니 국가인 중국이 대립하고 타협하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미국의 입장이 일방적으로 관철된 것처럼 G20 정상회의에서 중국의 입장이 그대로 관철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미국은 헤게모니를 유지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G20 정상회의의 규정력은 헤게모니 대체가 아니고 헤게모니를 둘러싼 신경전일 것이다.

국제 협상의 관점에서 G20 정상회의는 브레턴우즈 회의와 같은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은 아니다. 역사적 순간은 더 먼 미래의 일이며 G20 정상회의는 과도기적이고 한시적인 국제 협력의 장일 뿐이다. 몇 개의 의제를 조율하고 형식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고 중요 의제는 협의 과정 속에 계속 남겨 두고 미국과 중국의 이해와 관련한 새로운 제안들이 불쑥불쑥 제기되는 장이 G20 정상회의인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11월 11일과 12일에 열리는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상회의 개최로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 평가했지만, 의장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세계의 중심에서 샅바를 쥐고 힘을 겨루는 두 나라의 신경전을 말리는 일에 국한될 뿐이다. G20 서울 정상회의가 끝나고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 외교사에 기리 남을” 엄청난 성공을 자축하겠지만, 그 성공은 지금의 세계질서에서 힘의 역관계를 구성하는 두 중심축인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신경전을 말린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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