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브로콜리 너마저’의 새 앨범이 KBS에서 방송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이는 “김비서” KBS 다운 발상일지도 모른다. 정부 실책을 비판하면 ‘좌빨’로 모는 KBS는 강을 주제로 선정했다는 이유로 〈환경스페셜〉을 중단시킨 바 있고, 이명박의 라디오 주례연설에 반대한 PD를 지방으로 좌천시키는 등 언론통제를 해 왔다.
KBS는 부적격 판정을 했지만, 〈졸업〉은 완전히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데 적격하다. 나를 포함한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정말 잘 표현한 노래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자기존재를 부정당하는 “이 미친 세상”에 살고 있다. 정규직 취업은 하늘에 별따기고,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거나 운이 좋아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몇 년 동안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끙끙대야 한다. 가사 그대로 우리는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다.
난 졸업 즈음에 연애에 몰두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은 마치 “이 미친 세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그나마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브로콜리 너마저’가 사랑을 “짝짓기”로 비하하듯이 표현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88만 원 세대에게 사랑이나 결혼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 노래를 들으며 성행위를 떠올리는 KBS가 우습기만 할 뿐이다.
“우리는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라는 가사도 너무나 와닿는 부분이다. 이 시대에 청년들이 사회 진출한다는 것의 의미를 잘 성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노동]은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노동할 때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다 … 노동할 때 그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는다.”
사회 진출은 임금노동을 하는 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결코 자기 자신의 통제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88만 원 세대에게 사회 진출이라는 것이 88만 원에 ‘팔려가는’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 너무 과대해석한 걸까. KBS가 “팔려가는”을 “인신매매”로 해석한 것만큼 과대해석은 아닐 것이다.
졸업한 지 몇 년 지난 우린 지금 행복할까? “어디쯤 가야만 하는지 벌써 지나친 건 아닌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나는 “꿈에서 덜 깬” 아이처럼 되뇌인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