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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복지 확대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양보가 아니라 투쟁이다

《마르크스21》 8호에 실린 내 서평 ‘계급이 실종된 복지 담론의 취약성’을 비판한 홍기표 기획위원(이하 홍 위원)의 글(‘문제는 세금일세, 이 사람들아’)이 1월 3일 〈레디앙〉에 실렸다. 그 글의 요지는 이렇다.

첫째, ‘부자들한테서 재원을 빼앗아 와서 복지를 늘린다’는 나의 대안은 “임꺽정식 기본논리”이며 낡은 것이다. 반대로 노동자들의 보험료를 올려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자는 홍 위원과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의 대안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신선한 전략”이다.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 복지를 삭감하려던 조스팽 정부의 공격은 강력한 역풍에 부딪혀 좌절됐다. 이 투쟁은 전 세계 정부들의 신자유주의적 복지 삭감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를 보여 줬다.

둘째, 세금(조세제도)은 어차피 계급 타협적 제도다. 따라서 자본주의 타도를 추구하는 나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세금 문제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모순이다.

셋째, 홍 위원에게는 “공장구경도 못 해 본 사회주의자들을 우습게 여기는 버릇이 있다.”

마지막 문제부터 얘기하자면 그 버릇은 빨리 버려야 할 나쁜 버릇이다.

그는 “용접봉 한 번 못 만져 본 자칭 계급투쟁 종사자들” 운운하며 거듭해서 사회주의자들을 ‘현실도 잘 모르는 철부지 몽상가들’로 묘사한다.

그러나 나와 홍 위원의 진정한 차이는 ‘공장 노동을 하며 용접봉을 만져봤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설사 ‘공장 구경을 하고 용접봉도 만져 본’ 노동자라 하더라도 그가 혁명적 대안을 제시하면 홍 위원은 여전히 그것을 ‘우습게 여길’ 것이다.

조야한 경험주의적·노동자주의적 논법으로 상대방의 주장을 깎아내리려는 나쁜 버릇은 버려야 한다.

그런데 홍 위원이 “우습게 여기는” 것은 혁명적 대안만이 아니다.

홍 위원은 ‘부자에게 세금을’ 같은 오래된(전통적인) 개혁 요구조차 임꺽정까지 들먹이며 낡은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바로 이런 정치적 태도를 나는 《마르크스21》에 실린 서평에서 비판하고자 했다.

내가 《마르크스21》에 쓴 서평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레디앙)와 《모든 병원비를 건강보험 하나로》(도서출판 밈)의 저자들은 유럽 복지국가들의 사례를 들며 한국에서 그 정도 수준의 복지를 이루려면 한국 노동자들도 유럽 노동자들처럼 보험료와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혀 ‘정의’롭지 않다. 한국에서 복지 재정이 부족한 것은 기업주·부자 들이 세금과 보험료를 덜 내기 때문이지 노동자들의 부담이 적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자들의 사회보장 기여금 지출은 OECD 국가 노동자들의 평균 부담 수준을 상회하지만 기업주들의 부담은 한참 못 미친다. 반대로 한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수준은 OECD 국가 노동자들의 평균 실질임금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 기업주들이 가져가는 몫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자세한 통계나 사실들은 《마르크스21》을 참고하기 바란다).

따라서 진보진영은 기업주·부자 들의 부담을 늘리는 ‘정의로운’ 복지 대안과 이를 위한 대중투쟁 건설의 과제를 제시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낡은 것으로 취급하는 홍 위원은 단지 ‘혁명적’ 대안에 등을 돌리는 것만이 아니라 진정한 개혁 추구에서도 뒷걸음치는 것이다.

복지를 늘리려면 노동자들에게 세금과 보험료를 더 거둬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낡은 우파들의 논법이다. 따라서 정부 관료들이 “건강보험 하나로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논의 중”이라는 홍 위원의 주장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거꾸로 그것은 이 요구가 지배자들이 큰 부담 없이 수용 가능할 만큼, 급진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이다.

개혁을 위한 투쟁과 근본적 사회 변혁

홍 위원은 “계급투쟁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정파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황당한 주장”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홍 위원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자본주의 타도만 외치며 현실의 개혁과 투쟁에는 무관심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 아니면 심각한 왜곡이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가장 일관되고 철저한 투사가 되려고 노력해 왔다.

복지국가의 한계를 비판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복지국가를 옹호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정열을 쏟아 왔다.”(고세훈,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후마니타스)

이것은 홍 위원의 주장처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겉으로는 계속 계급투쟁 타령을 하면서 실제로는 소리없이 조금씩 전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 사회 변혁을 추구하면서 개혁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는 것은 결코 모순되거나 대립되지 않는다. 개혁이 노동자들에게 실제로 이득이 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폭넓게 단결하는 데도 도움이 되며, 무엇보다 개혁을 위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단련되고 조직화되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단지 부자들이 세금만 더 내면 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세금의 원천인 부의 불공정한 분배, 더 거슬러 올라가 분배만이 아니라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들의 독점 같은 근본적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개혁을 위한 투쟁과 혁명을 위한 투쟁이 그 시작부터 칼같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또 복지국가 건설 같은 수준의 사회 개혁을 이루려면 거의 혁명적 수준의 강력한 대중 투쟁이 뒷받침돼야 한다.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유럽의 복지국가 건설 과정이 이를 잘 보여 준다. 한국에서도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 같은 복지제도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 직후다.

게다가 호황이었던 당시와 달리 오늘날처럼 경제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더 많은 복지를 제공하도록 강제하려면 훨씬 강력한 투쟁이 벌어져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복지국가라는 과제를 성취하려면 개혁주의적 수단(노사정 협의나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이 아니라 체제 전체를 뒤흔들 수준의 투쟁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부터다. 실제로 그런 투쟁이 벌어진다면 노동자들은 단지 유럽 복지국가 수준의 개혁에 멈추려고 할까? 그래야 할까?

20세기에 벌어진 여러 차례의 혁명적 상황을 돌이켜 보면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혁명적 요구를 제시한 것이 아니었고 그런 투쟁이 자연스레 일정한 수준의 타협에서 끝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현실의 개혁을 위한 노동자 투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이런 투쟁들을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투쟁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반대로 홍 위원이나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등은 개혁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무하기는커녕 노동자들이 “먼저 희생과 헌신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양보를 ‘사회연대’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면서 말이다.

홍 위원은 노동자들이 먼저 양보하는 게 복지 확대의 “실현 가능성을 높인”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이 나라 노동자들의 경험에 비춰 봐도 사실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보험료는 대폭 올랐지만 복지는 그에 비춰 아직도 형편없는 수준이다.

당장 IMF 시절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노동자들이 “희생과 헌신을 감행”한 금 모으기는 어떻게 됐는가. 노동자들이 낸 세금으로 마련한 공적자금을 다 쓰러져 가는 기업들에 쏟아 부어서 기업주들이 “감동” 받았나?

도대체 지난 20년 동안 이런 식(노동자들이 먼저 희생하고 양보하는 방식)으로 자본가들이 양보한 것이 있기나 한가? 양보가 “실현 가능성을 높인”다는 홍 위원의 주장이야말로 공상적이다. 자본가들은 개인적 선의와 관계 없이 시장 경쟁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홍 위원처럼 “적대 계급과 공존을 추구”하는 것은 타협이라기보다 ‘투항’에 가깝다.

애당초 타협이라는 말 자체가 그 밑에 이해관계 대립과 충돌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투쟁의 전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로지 타협의 기술만 얘기하면 우리편에 유리한 타협이 될 리가 없다. 무릎 꿇고 굴종하겠다는 노동자들에게 “감동”받아서 스스로 양보할 자본가는 없다. 당연히 이런 자발적 “희생과 헌신”은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의 힘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건강보험 하나로’는 무상의료 아니다”는 실토

홍 위원의 조야한 계급론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계급이 “끊임없이 형성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세금을 내고 사회적 부담에 참여해야 계급적 관점이 발생하고 확대된다. 세율이 높을수록 그의 사회연대 공헌도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금을 많이 내는 노동자일수록 계급의식과 연대의식이 높아진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소득이 워낙 적어 세금을 많이 내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계급적 관점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계급은 머릿속 생각이나 의식 수준 따위와 관계 없이 착취 관계라는 물적 토대에서 비롯한다.

물론 노동자들의 의식이 대단히 불균등하고 심지어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도 뒤죽박죽이기 십상인데 이것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홍 위원이 말하는 ‘세금 많이 내기’가 아니다.

세금과 계급에 대한 홍 위원의 논리는 조세제도의 근본적 불평등을 지적하기는커녕 아예 조세제도를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가 현행 건강보험 제도를 찬양한 데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국민건강보험은 ‘능력에 따라’ 보험료를 내고 ‘필요에 따라’ 급여를 받는 아름다운 제도인 것이다.”(《모든 병원비를 건강보험 하나로》, 220쪽) 엄청난 과장이다. 무슨 공산주의 사회가 되기라도 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홍 위원은 민주노동당의 ‘건강보험 하나로 무상의료를’ 캠페인에 모순이 존재한다며 이렇게 비판했다.

“‘건강보험 하나로’는 무상의료가 아니다. 건보료를 더 내자는 것이 어떻게 무상의료인가? 완벽한 무상의료가 실현되려면 ‘병원 국유화!’를 주장해야 맞다.”

결국 건강보험료를 더 내자는 것은 무상의료도 아니고 병원 국유화 같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도 보험료만 올리면 무상의료 수준으로 보장성을 확대할 수 있다는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의 그동안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실토한 셈이다.

사실 공공의료기관 확충(병원 국유화)은 무상의료와 함께 지난 20년 넘게 진보진영의 핵심 개혁 과제 중 하나였다.

홍 위원은 결국 진보진영이 기존의 개혁 요구에서 후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기왕에 타협할 거면 아예 투쟁을 포기하자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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