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복지 확대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양보가 아니라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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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21》 8호에 실린 내 서평
첫째,

둘째, 세금
셋째, 홍 위원에게는
마지막 문제부터 얘기하자면 그 버릇은 빨리 버려야 할 나쁜 버릇이다.
그는
그러나 나와 홍 위원의 진정한 차이는
조야한 경험주의적
그런데 홍 위원이
홍 위원은
내가 《마르크스21》에 쓴 서평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혀
한국 노동자들의 사회보장 기여금 지출은 OECD 국가 노동자들의 평균 부담 수준을 상회하지만 기업주들의 부담은 한참 못 미친다. 반대로 한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수준은 OECD 국가 노동자들의 평균 실질임금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 기업주들이 가져가는 몫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따라서 진보진영은 기업주
이런 주장을 낡은 것으로 취급하는 홍 위원은 단지
복지를 늘리려면 노동자들에게 세금과 보험료를 더 거둬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낡은 우파들의 논법이다. 따라서 정부 관료들이
개혁을 위한 투쟁과 근본적 사회 변혁
홍 위원은
이것은 홍 위원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자본주의 타도만 외치며 현실의 개혁과 투쟁에는 무관심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 아니면 심각한 왜곡이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가장 일관되고 철저한 투사가 되려고 노력해 왔다.
복지국가의 한계를 비판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이것은 홍 위원의 주장처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근본적 사회 변혁을 추구하면서 개혁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는 것은 결코 모순되거나 대립되지 않는다. 개혁이 노동자들에게 실제로 이득이 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폭넓게 단결하는 데도 도움이 되며, 무엇보다 개혁을 위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단련되고 조직화되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단지 부자들이 세금만 더 내면 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세금의 원천인 부의 불공정한 분배, 더 거슬러 올라가 분배만이 아니라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들의 독점 같은 근본적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개혁을 위한 투쟁과 혁명을 위한 투쟁이 그 시작부터 칼같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또 복지국가 건설 같은 수준의 사회 개혁을 이루려면 거의 혁명적 수준의 강력한 대중 투쟁이 뒷받침돼야 한다.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유럽의 복지국가 건설 과정이 이를 잘 보여 준다. 한국에서도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 같은 복지제도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 직후다.
게다가 호황이었던 당시와 달리 오늘날처럼 경제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더 많은 복지를 제공하도록 강제하려면 훨씬 강력한 투쟁이 벌어져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복지국가라는 과제를 성취하려면 개혁주의적 수단
더 중요한 것은 여기부터다. 실제로 그런 투쟁이 벌어진다면 노동자들은 단지 유럽 복지국가 수준의 개혁에 멈추려고 할까? 그래야 할까?
20세기에 벌어진 여러 차례의 혁명적 상황을 돌이켜 보면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혁명적 요구를 제시한 것이 아니었고 그런 투쟁이 자연스레 일정한 수준의 타협에서 끝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현실의 개혁을 위한 노동자 투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이런 투쟁들을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투쟁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반대로 홍 위원이나
홍 위원은 노동자들이 먼저 양보하는 게 복지 확대의
당장 IMF 시절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노동자들이
도대체 지난 20년 동안 이런 식
이런 상황에서 홍 위원처럼
애당초 타협이라는 말 자체가 그 밑에 이해관계 대립과 충돌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투쟁의 전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로지 타협의 기술만 얘기하면 우리편에 유리한 타협이 될 리가 없다. 무릎 꿇고 굴종하겠다는 노동자들에게
“‘건강보험 하나로’는 무상의료 아니다”는 실토
홍 위원의 조야한 계급론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계급이
그런데
세금을 많이 내는 노동자일수록 계급의식과 연대의식이 높아진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소득이 워낙 적어 세금을 많이 내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계급적 관점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계급은 머릿속 생각이나 의식 수준 따위와 관계 없이 착취 관계라는 물적 토대에서 비롯한다.
물론 노동자들의 의식이 대단히 불균등하고 심지어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도 뒤죽박죽이기 십상인데 이것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홍 위원이 말하는
세금과 계급에 대한 홍 위원의 논리는 조세제도의 근본적 불평등을 지적하기는커녕 아예 조세제도를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홍 위원은 민주노동당의
결국 건강보험료를 더 내자는 것은 무상의료도 아니고 병원 국유화 같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도 보험료만 올리면 무상의료 수준으로 보장성을 확대할 수 있다는
사실 공공의료기관 확충
홍 위원은 결국 진보진영이 기존의 개혁 요구에서 후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기왕에 타협할 거면 아예 투쟁을 포기하자는 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