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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전 20년:
흉칙한 실체를 드러낸 ‘새로운 세계 질서’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 점령했고 이라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비극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전쟁이 바로 20년 전인 1991년에 벌어진 걸프전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고 쫓겨난 기억 때문에 미국 지배자들은 20여 년 동안 어느 나라도 본격적으로 침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 패배가 준 상처를 잊고 더 나아가 석유 자원이 집중돼 있는 중동을 쥐락펴락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미국이 1991년에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걸프전을 시작한 배경은 바로 이것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9·11 테러 후 ‘테러와의 전쟁’을 일으킨 조지 W 부시의 아버지)가 주도했던 걸프전은 미국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보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구소련과 동유럽이 몰락하면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의 양강 구도는 무너지고 1990년대부터는 새로운 조짐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질서’는 단순히 미국의 일방적 우위를 뜻하지 않았다. 미국은 군사력은 막강했지만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쇠퇴했고 반대로 독일과 일본의 경쟁력은 더 높아졌다. 정치·경제·군사적 다극화 조짐이 나타났다. 이 상황에서 최강의 군사 대국으로서 미국은 걸프 전쟁을 통해 다른 열강에게 자신의 패권을 확인시키고자 했다.

당시 조지 부시는 ‘인도주의적 개입’과 ‘민주주의’를 말했다. 쿠웨이트 알 사바 왕가와 유가인상 폭을 두고 다투다가 급기야 쿠웨이트를 점령한 “새로운 히틀러” 사담 후세인을 벌주고 점령당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겠다는 것을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가 쿠웨이트에 민주주의가 정착되기를 바란다고 시사하는 것은 위선이다. 사담 후세인이 잔인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개입이 정당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정책이 잔인한 지도자들을 처벌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과 동맹을 맺지 말았어야 했다. 전쟁은 후세인이 우리의 석유 생명선을 쥐고 흔들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활적인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것에 대해 사과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미국의 전 대통령 닉슨이 걸프전 당시 한 솔직한 말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분은 1990년대 제국주의 강대국의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였다. 좌파 중 일부는 이런 이데올로기에 흔들려 군사 개입에 찬성하거나, 일관되게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한 군사개입의 결과는 야만 그 자체였다.

20년 전 걸프전의 결과도 끔찍했다. “외과 수술처럼 정확한” 공습과 “스마트한” 폭탄으로 “부수적 손실”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이라크 주택들은 무너져 내리고 학교와 병원들은 치명적인 무기에 타격을 입었다. 폭격을 맞은 건물에서는 토막난 사람의 몸이 끌려 나왔다. 이라크의 사회 기반 시설은 폭격을 맞아서 먼지가 됐다.

합참의장이던 콜린 파월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드디어 베트남 증후군을 이라크 사막에 묻었다”고 말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중동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군사기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걸프전 승리 이후 20년 동안 미 제국주의는 승승장구해 왔는가? 그렇지 않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은 패배했고 10년째 되어 가는 아프가니스탄 점령은 휘청거리고 있다. 그리고 2008년 미국발 경제 위기로 야수는 더 기진맥진해졌다.

반면 제국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전 세계 여론은 더 폭넓어졌다. 그리고 제국의 거짓말에 좀처럼 사람들이 속지 않게 됐다. 1991년 1월 12일, 폭격이 시작되기 나흘 전에 10만 명이 참가한 런던의 시위 행진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반전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2003년에는 수천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한국에서도 그랬다. 20년 전 1월 21일 이라크에 군 의료진 파병동의안이 국회의원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통과됐을 때 국내에서 이렇다 할 반대 시위는 없었다. 그러나 2003년에는 1만 명 규모의 대중시위대가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는 중동의 민중과 연대했다.

하지만 상처입은 야수가 더 사납듯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증파하고 한반도에서도 제국주의적 개입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