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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민중 저항의 역사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와 그에 맞선 투쟁은 지난 이집트 1백 년 역사의 주된 특징 중 하나였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도 미국과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동맹 관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지금 무바라크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억압자에 맞선 이집트인들의 오랜 투쟁 역사의 일부인 것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대규모 민족주의 운동이 영국 점령군과 이집트의 친영 왕조에 도전했다.

가말 압둘 나세르와 자유장교단은 1952년 7월에 권력을 잡았다. 나세르는 국가를 이용해 중동에서 제국주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다.

나세르는 이집트와 다른 중동 나라들이 좀더 독립적인 노선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려 했다.

그의 아랍민족주의론은 당시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대대적인 토지 개혁을 추진하고 가장 부유한 가문의 재산을 압류했다.

그는 주요 은행, 보험 회사, 해운 기업과 산업과 상업에서 주요한 기업들을 국유화했다.

당시 영국이 인도를 통하는 관문인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관리했다. 영국군은 게릴라 공격과 대중 시위에 밀려 이집트에서 물러나야 했다.

나세르의 급진적 개혁은 아랍 민중에게 큰 영감을 줬고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를 위협했다.

1956년 7월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을 때,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은 나세르 정부를 파괴할 목적으로 이집트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들의 공격은 이집트 기층 저항과 미국 정부가 자기 이익을 위해 이들 나라를 비판하면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나세르가 서방에 성공적으로 저항한 덕분에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전 세계 민중 사이에서 그의 인기가 크게 올라갔다.

영국의 수에즈 공격은 재앙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중동을 지배하는 세력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나세르는 빈곤을 해결하려 했지만,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움직임은 제약하려 했다.

이집트 노동자들은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나세르가 ‘아랍의 단결’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강조하면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집트 국가는 제국주의 열강을 물리칠 만큼 강하지 않았다. 아랍 전역으로 확산 중이었던 부패한 자국 지배자와 식민 열강에 맞선 아랍 민중의 운동만이 그것을 할 수 있었다.

1967년 이스라엘이 6일 전쟁에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연합군을 물리쳤을 때 나세르 혁명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다.

나세르는 좌절했고 3년 뒤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러나 그가 제국주의와 갈등을 빚었던 덕분에 그는 아랍 민중 사이에서 존경받는 인사로 남았다.

반대로, 경제 위기의 충격이 전해지면서 나세르의 후계자인 안와르 알사다트는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미국의 가장 충실한 동맹으로 만드는 정책을 추구했다. 무바라크 정부는 이 정책을 계승했다.

1973년 사다트는 1967년 전쟁에서 잃었던 이집트 영토를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이 공격으로 이스라엘은 타격을 입었고 전쟁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정체 상태에 빠졌다. 결국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단독 평화 협정을 맺었다.

아랍 민중은 분노했고, 이스라엘은 계속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고 시리아 영토의 일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사다트는 이집트를 제국주의 질서의 핵심 부속물로 만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 가져올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미국 정부에게 대규모 지원을 받은 대가로, 사다트는 ‘인피타’(‘문호 개방’)로 불리는 경제 계획을 시작했다.

이 정책 덕분에 서방 다국적 기업들은 세금을 내지 않고 이집트에서 영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인피타는 평범한 이집트인들에게는 재앙적 결과를 가져 왔다.

인피타

저렴한 소비재를 생산하던 국유 산업들이 해체됐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엘리트들이 탄생했다.

이런 정책에 대한 분노는 1977년 1월 식량 가격 인상 발표를 계기로 폭발했다. 사람들은 카이로 중심가를 점거하고 사다트는 가까스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사다트는 좌파, 노조원, 자유주의자, 무슬림형제단 등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1981년 이슬람주의자들은 사다트를 암살했다. 이집트 민중은 사다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는 사다트를 이어 대통령이 됐다. 그는 사다트의 경제와 탄압 정책을 계승했다. 무바라크는 통치 기간 내내 긴급조처법의 적용을 해제하지 않았다.

이슬람주의자 수백 명이 군사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비밀 경찰은 정치 활동가 수만 명을 잡아 가두고 고문했다.

1989년 철강 공장 파업을 진압하려고 탱크를 공장에 보내기도 했다.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도전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부활할 수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 이어 민주화 요구 시위와 노동자 파업 물결이 일어났다.

무바라크 정부가 무너진다면 석유가 풍부한 이 지역의 기존 질서가 뒤흔들릴 것이다.

이집트는 아랍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나라다. 아랍에서 노동계급 수가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튀니지 항쟁이 이집트 민중에게 영감을 줬듯이, 이집트 혁명이 성공한다면 아랍의 부패한 친서방 지배자들의 지위도 크게 위협받을 것이다.

이스라엘도 이 점을 우려한다. 미국 정부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뒤부터 변화를 바라는 중동의 저항 운동을 억누르는 데 이스라엘을 이용해 왔다.

중동 지역의 혁명적 전환은 이런 구도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 그것은 아랍 민중이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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