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혁명이 독재자를 물리치다
〈노동자 연대〉 구독
독재자가 물러갔다. 무바라크는 갔다. 이스라엘의 친구, 제국주의의 친구, 미국의 친구이자 세계은행의 친구가 물러났다. 무바라크는 역사상 가장 큰 대중 운동에 의해 제거됐다.
제국주의가 사랑한 이른바 ‘온건한 강자’는 민주화 활동가들의 입을 틀어막을 뿐 아니라 극단적 잔인함, 정실주의, 부패로 얼룩진 정권을 운영했다. 무바라크 정권은 이집트인들뿐 아니라 아랍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무바라크가 하야한 것은 제국주의, 이스라엘, 독재자들과 석유 생산 왕국들에게 큰 충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
무바라크는 전임 대통령인 안와르 사다트가 1979년 서명한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에 뒤이은 거대한 반발에 힘입어 집권할 수 있었다.
무바라크는 ‘이탈’ -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아랍 국가들의 연합을 깨려는 미국의 전략 - 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1978년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서명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 덕분에 군사적 부담이 준 이스라엘은 1982년 레바논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 침략이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는 결과를 낳았을 때 무바라크는 침묵을 지켰다.
무바라크 정권은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을 점령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도왔다. 그는 2006년 아랍 정부들을 동원해 헤즈볼라와 레바논 저항세력을 고립시키려 했고 레바논의 친미 인사들에게 돈을 댔다.
무바라크는 1987년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를 진압하려는 시도를 적극 지원했다. 그는 이집트 언론들이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라고 명령했다. 이런 이집트의 도움 덕분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국이 거래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1990년 걸프 전쟁에 파병했고 2001년과 2003년 각각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로 향하는 미국 군함들에게 수에즈 운하를 개방했다. 그는 이집트를 거대한 감옥으로 바꿨고 ‘테러와의 전쟁’의 ‘특별 인도’[이른바 ‘테러’ 용의자를 불법적으로 납치해 심문하는 것] 정책에 자신의 고문실을 제공했다.
무바라크는 최악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국영기업의 사유화를 진행했고 1950년대 쫓겨난 지주들이 토지를 집적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집트를 ‘나일강의 호랑이 경제’로 바꾸려던 무바라크의 꿈 때문에 많은 이집트인들이 빈곤으로 내몰렸다. 월급이 3백26파운드[약 6만 원]에 불과한 이집트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은 1984년부터 큰 변화가 없었다. 반면에 물가는 크게 올랐다.
무바라크는 [독립적] 노동조합을 금지했고 활동가들을 감옥에 보냈고 고문했다. 그는 국영기업들을 자기 하수인과 세계적 기업에 넘겼다. 무바라크와 그의 부패한 친구 – ‘1천대 가문들’로 불리는 - 는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는 선거를 조작하고 반대자를 감옥에 가두는 등 이집트를 자기 왕국처럼 운영했다.
이제 무바라크가 제거되면서 이스라엘은 고립됐다. 모든 아랍 정권의 안위가 위태로워졌다. 수십 년 동안 아랍 세계를 물들였던 체념의 분위기가 이제 깨졌다.
이 혁명은 지난 30년간 추진된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략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번 이집트 시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하아레츠〉는 이스라엘이 ‘전략적 곤경’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이집트 혁명 덕분에 제국주의와 그의 중동 동맹들은 전략적 절망에 빠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