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이집트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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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은 자유시장적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분명한 반대 신호를 보냈다.
평범한 사람들은 30년 동안 자신에게 고통을 준 정치·경제 정책들을 거부할 기회를 준 거대한 대중 운동을 만들었다. 이 정책들은 세계적으로 표준적 경제 발전 방식으로 여겨져 온 것들이다.
이집트 혁명은 세계화와 시장이 지구를 조직하는 원칙이어야 한다는 가정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이집트를 경제 개혁의 모델이자 미국 제국주의 전략의 근거지로 삼아 온 관행에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집트인들은 호스니 무바라크를 무너뜨리면서 기성 체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누가 우리를 통치하는가? 통치자는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가? 누가 정부 정책을 결정하는가?
이런 의문들이 중동 전역에서 제기되고 있다. 중동 국가들은 신자유주의와 이것의 구호인 ‘대안은 없다’는 사고를 받들어 왔다.
신자유주의는 정부가 아니라 민간 기업이 경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집트는 이 원칙의 실험실이었다. 대처주의가 등장하기 오래전에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인피타’(개방) 정책을 시작했다.
이 정책은 국가가 운영하는 사회복지를 해체하고 민간 기업에 주도권을 넘기는 것을 골자로 했다.
무바라크는 이 생각을 받아들이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필수 식량에 대한 정부 보조금을 삭감했다. 빵, 밀가루, 쌀, 설탕과 식용유에 대한 정부 지출 가운데 3분의 2가 사라졌다. 보조금이 추가로 삭감되면서 많은 가족의 생활은 밑바닥 수준으로 하락했다.
2007년에는 몇몇 도시에서 식량 소요가 발생했다. 사람들이 빵을 얻으려고 빵집 앞에서 서로 다투면서 네 달 동안 11명이 죽었다. 세계은행과 IMF는 무바라크의 정책을 칭찬했다. 그들은 무바라크에게 보조금을 더 삭감할 것을 주문했다.
무바라크는 국유기업들을 사유화했고 농민 수백만 명을 자기 땅에서 내쫓았다. 악명 높은 96조에 근거를 두고 이집트 의회는 토지가 식민지 시대 소유주들에게 반환돼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바람에 마을 주민이 통째로 쫓겨나는 경우가 흔했고 경찰은 토지 반환에 관한 법원 판결을 잔인하게 집행했다.
1997년 무바라크 정부가 농민들을 토지에서 쫓아내기 시작하자 1백 개 넘는 마을들이 저항했다. 지주와 ‘펠라힌’(농민) 사이의 충돌 과정에서 17명이 죽었고, 5백33명이 다쳤고, 1천5백88명이 체포됐다.
그때부터 이집트 농촌 마을에서는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농민 수천 명은 지주가 고용하고 경찰이 지원하는 깡패들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이집트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속했다. 2007년 세계은행은 이집트를 ‘세계 최고 개혁 국가’로 꼽았다. 카이로의 경제지들은 무바라크를 ‘IMF의 모범생’으로 묘사했다. IMF는 전 세계 정부들이 이집트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집트인들은 이런 친기업 정책에서 누가 이득을 얻어 왔는지 잘 안다. 무바라크는 신흥 자본가, 금융가, 투기꾼 들의 치부 행위를 보호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