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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부터 드러나 온 체제수호법의 본색
1992년 국제사회주의자들(IS) 사건과 최일붕 모두진술

최근 법원이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에 내린 유죄 판결은 북한 정권과 체제를 반대하는 단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북한은 핑계일뿐이고 국가보안법의 진정한 본질은 정권과 체제를 수호하는 악법이라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와 법원이 북한과 무관한 단체를 국가보안법으로 공격한 것은 결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북한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해 온 국제사회주의자들(IS)은 이미 20년 전인 1990년대 초부터 거듭 국가보안법으로 공격당해 왔다.

아래 글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탄압을 당해 구속·복역했던 최일붕(현 다함께 운영위원) 동지가 1992년 12월 24일 법정에서 모두진술한 내용이다. 국가보안법의 진정한 본질을 폭로하고 있다.

‘국가변란’, 즉 정부(넓은 의미의) 전복과 새 정부 조직을 선전하는 언론·출판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이 자리에 앉은 한 반체제 지식인은 순수함을 비교적 많이 간직한 채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때문에 방황도 많이 했고 고뇌도 많이 했습니다.

어떤 한 개인이나 특정 사건이 저를 이 길로 이끌어 온 것이 아니라, 여러 사건들과 개인들이 제 마음에 누적적인 충격을 주었고 저는 저대로 거기에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한 것이 결합되어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유와 민주의 지칠 줄 모르는 추구였습니다. 그리고 그 추구의 최종 결론은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민주주의는 인간사회가 착취와 억압으로 분열된 상태에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아마도 저는 종교에의 귀의와 그로부터의 단절이라는 이중적 과정을 거쳐야 했나 봅니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이 제 지적·정신적 성장에 필수불가결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실천과 결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제 사상은 아직 명확한 꼴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1987년 6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87년 6∼8월의 노동자 시위와 파업과 공장점거는, 대중의 잠재력을 이론상으로는 믿고 있었지만 눈으로 보지는 못했던 경험 없는 지식인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에 지식인들은 대부분 전두환 정부에 경멸감과 혐오감을 느끼며 ‘6월항쟁’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대중의 저항이 그러한 규모로, 그리고 그러한 격렬함으로 일어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중에 대한 지배자들의 경멸감을 그들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었죠.

지배자들은 대중의 폭력을 꾸짖었지만, 그들은 권인숙 씨를 강간으로 고문하고 박종철 씨를 질식시켜 죽이며 이한열 씨를 직격 최루탄으로 쏴 죽이는 정치권력도 폭력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습니다.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를 최루탄 직격발사로 죽게 한 것은 폭력이 아니고 이석규 씨의 동료 노동자들이 이석규 씨 장례식을 민주노동자장으로 치르려는 것은 ‘폭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지의 죽음을 기리려는 노동자들은 ‘반인륜적 패륜’을 범하려는 것이요, 이석규 씨의 시신을 경찰이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은 ‘인륜’과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과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대표는 양쪽 모두의 폭력을 꾸짖었지만, 그들은 폭력의 겉모습만 보았지, 폭력의 뿌리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폭력적 갈등을 계속 창출해 내는 체제의 억압적 메커니즘을 보지 못하고 도덕론적으로 폭력을 개탄만 해 봤자 지배자들의 편을 드는 꼴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철학자가 지적했듯이,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었습니다. 적반하장으로 권인숙 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부천서 형사 문귀동은 87년 6∼8월 이후에 직권 파면당하게 되었고, “‘탁’하고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던 박종철 씨는 물고문을 당해 죽은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계급 간의 세력균형이 바뀌니까 강자의 이익에 따라 정의도 바뀐 것입니다.

정의

흔히 ‘정의’와 사법부는 동일시되곤 합니다. 권인숙 씨 사건과 박종철 씨 사건에 대한 87년 6∼8월 이후 법원의 판결과 최근에 안기부의 변호인 접견 거부 행위가 위헌이라고 법원이 결정해도 안기부가 콧방귀도 안 뀌는 것을 보면, 그리고 법무부 장관과 검찰 총장을 지냈다는 “미스터 법질서”라는 사람[김기춘]이 노골적으로 관권선거 운동을 해도 검찰·경찰이 양해해 주리라고 확신하는 것을 보면 역시 정의는 강자의 이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민주적 권리와 민주개혁이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전보다 지금 더 상대적으로 민주화되지 않았느냐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로부터 주어지기 이전에 아래로부터 저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6·29선언’으로 일컬어지는 전두환·노태우의 대통령 직선제 양보 자체가 6월의 대중반란이 없었다면 제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7∼8월 대중파업과 공장 점거가 없었다면 노동자들은 지금까지도 노동조합조차 조직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법정에서 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법무장관으로 하여금 그러한 개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인권을 옹호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항의와 운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이 기존 질서에 반대해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킬 때 그것은 대중의 권리, 정당한 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대혁명의 사상가들은 국민저항권이라는 사상에까지 도달했습니다. 당시에 ‘국민’은 봉건 구체제의 지배계급에 억압당하던 ‘제3계급’[귀족도 사제도 아닌]을 뜻했습니다. 1987년 6∼8월에 제가 목격한 것은 바로 현대의 제3계급, 즉 대자본도 소자본도 아닌 노동대중의 저항권 획득 투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와 국제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은 따지고 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민주적인 혁명적 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지배자들은 민주주의와 그 권리를 혐오하고 언제든 몰수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려 왔습니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에서 꽃피웠던 민주주의는 그리스 지배계급 자신과 마케도니아인과 로마제국의 잇따른 침해에 의해 서기 2세기 중엽쯤엔 완전히 말살되어 버리고 맙니다. 기원전 5∼4세기에는 놀부가 자기의 가축들을 이웃 농민의 밭에 들여보내 작물을 짓밟게 하고 그리하여 몰락한 농민의 밭을 싼 값에 인수하려는 생각을 엄두도 못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이후 이러한 종류의 일들은 빈번해지기 시작해 기원전 1세기부터는 ‘민주주의’라는 낱말 자체가 로마제정을 뜻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역시 비슷한 타락과 왜곡을 겪어 왔습니다.

17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자유민주주의는 봉건적 억압으로부터의 민중의 자유와 말 뜻 그대로의 민주주의, 즉 민중의 지배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민중의 힘으로 봉건 지배계급을 타도한 신흥 중간계급, 즉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의 발달 덕분에 자기와 함께 그러나 자기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한 노동자계급의 민주적 권리 추구를 싫어하고 두려워하여 1850년 이후로는 보수적인 입장으로 돌아서버립니다. 이때부터 민주적 권리들은 잇따라 훼손당해 1세기 반이 지난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는 전혀 자유롭지도 전혀 민주적이지도 않은 과두 정부 또는 심지어 군사독재 정부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승만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노태우도 모두 한결같이 자신의 정부를 자유민주주의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그러나, 명칭과 실체적 내용은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승만의 자유당이 전혀 자유주의적이지 않았듯이,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전혀 민주적이지도 공화주의적이지도 않았듯이,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이 전혀 민주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듯이, 히틀러의 나치, 즉 국가사회주의당이 전혀 사회주의와 관계 없었듯이, 옛 소련공산당(CPSU)이 전혀 공산주의와 관계 없었듯이, 북한의 조선노동당이 전혀 노동자계급의 당이 아니듯이, 노태우·김영삼의 민주자유당도 전혀 민주적이지도 자유주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민자당 정부 치하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정보사터 사기사건이나 수서비리 사건처럼 지배자들이 대규모 부정부패를 자행할 자유와 그것을 적당히 덮어 줄 자유를 뜻했습니다. 민자당의 자유민주주의는 거대자본이 페놀을 방류할 자유를 뜻했습니다. 또, 그것은 임수경·문규현은 방북한 뒤 쇠고랑을 차는 데 반해 정주영·김우중은 ‘통치행위’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자유로이 방북할 자유, 보안사가 민간인 수천 명을, 어쩌면 수만 명을 감시할 자유, 미국이 이라크의 어린아이들 수천 명을 폭사시킬 때 거기에 돈을 대주고 병력을 보낼 자유, 천안문의 민주 학생과 노동자를 도살한 등소평을 전혀 한마디도 비난하지 않고 그와 수교를 할 자유, 단순한 시위 참여로써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던 강경대 씨를 때려 죽이고 그 뒤 그 아버지도 사소한 혐의로 박종철 씨 아버지와 함께 감옥에 처넣을 자유, 통신의 자유라는 헌법이 보장한 민주적 권리를 비웃고 임시우편단속법의 이름으로 우정연구소를 통해 우편물을 검열할 자유, 택시운전 노동자들에게 완전월급제를 선거공약으로 약속해 놓고 모른 척할 자유, 임금인상과 조합 인정을 요구하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백골단이라는 제복 입은 깡패를 동원하여 짓밟은 자유를 뜻했습니다.

요컨대 자유민주주의는 착취하고 억압할 ‘자유’였고, 착취할 수 있는 공장과 억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대자본끼리만 하는 ‘민주주의’였습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순전한 형식 절차상의 민주주의로서 선거나 의회 등의 대의제도였는데, 이것은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러한 위선과 거짓과 사취(詐取)를 비난하고 이런 일이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의 영구적 특징임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전혀 자유롭지 못하고 전혀 민주적이지 못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정치질서 변혁을 말과 글로 주장한 저와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정치권력의 이익을 침해했다 해서 이렇게 부자유의 몸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은 투표일에만 주권자가 됩니다.

저와 국제사회주의자들이 국가보안법의 입법 목적이라는 국민의 자유를 침해했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했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우리가 말과 글로 논박하고 폭로함으로써 지배자들이 거짓말할 자유를 침해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저와 국제사회주의자들이 북한 국가 또는 그 추종자의 사주와 조종을 받았습니까? 우리 조직은 흔히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북한·중국·옛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이론체계를 바탕으로 삼는 것이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이처럼, ‘남한도 북한도 아닌 국제사회주의’를 자신의 정치원칙을 대표하는 모토로 삼고 있는 우리가 북한 관료나 그 추종자의 사주와 조종을 받아 북한 국가의 활동을 남한에 연장하는 활동을 하겠습니까? 이 점은 검찰 자신이 잘 알기에 저와 국제사회주의자들을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혐의가 아닌 반체제 선전 혐의로 기소했고, 따라서 저도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흉측한 법률

이처럼 저와 국제사회주의자들 자신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스스로 제기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객관적인 총체적 상황 자체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었습니까? ‘국가변란‘이라는 정범의 실행행위 자체가 아닌 그 선전이나 권유행위만으로도 중대한 위험이 발생할 만큼 객관적인 총체적 상황이 절박했고 또 지금 절박합니까?

만약 검찰이 국가기관을 대표하여 ‘그렇다’고 답변한다면 국가는 자본주의와 그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영구적 위기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는 셈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국가보안법이 어떤 형태, 어떤 이름으로든 존속하는 한 대한민국 국가는 영구적 위기에 처해 있음을 자인하는 셈일 것입니다.

만약 검찰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단순히 중대한 위험의 염려만으로도 언론·출판·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법대로 하는 것뿐이라는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기본권 가운데서도 제1의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는 기본권이며 그 자유의 제한은 곧 다른 모든 자유의 상실을 뜻하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약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본질적 내용 자체를 침해하면서 “악법도 법”이라는 진부한 실정법 지상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궁색하고 옹색한 답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이 법으로 존중받으려면 사회 성원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데, 국가보안법은 군장성들이 각각 1961년과 80년에 무력정변으로 결성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제정한 법을 91년 5월 11일 집권 민자당이 단독으로 날치기 통과시킨 개악안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는 국가보안법이, 특히 그 가운데 제게 적용된 제7조가 사상과 그 표현의 자유를 억누름으로써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정당들을 만드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박찬종은 당 만들 자유가 있고 노상 토론과 노상 책 판매를 할 자유가 있어도 국제사회주의자들은 그럴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1990년 11월 30일 국정감사를 위해 대검찰청이 국회 법사위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 가운데 무려 80퍼센트가 바로 7조 1항과 5항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이적 또는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하거나 그러한 간행물을 제작 또는 소지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국가보안법의 다른 조항들은 모두 형법 등에도 이미 포함되어 있는 데 반해 제7조만이 국가보안법의 특유한 법 규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 제7조가 전체 국가보안법을 대표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국보법 조항 가운데 가장 국보법다운 조항인 것입니다.

따라서, 저와 국제사회주의자들에게 적용된 국보법 제7조는 악법 중의 악법이며, 사회의 극소수의 이익을 위하여 압도 다수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므로 실정법으로서의 규범력을 주장할 수조차 없는 끔찍하고 흉측한 법률입니다.

인간 정신의 고귀함

87년 6∼8월의 경험으로 저는 대중의 잠재력을 확인했지만, 그리고 연속혁명 이론을 현실에 비추어 만족스럽게 검증했지만, 제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구체적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노동자는 스스로 해방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지식인인 저에게는 조직은 노동자들이 하고 저 자신은 그들이 어떤 사상에 따라 조직을 건설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공급한다는 겸허한 역할분담론을 뜻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조직 기반 없이도 좌익 내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스탈린주의를 극복하고 주도권을 쥔다는 것은 부질없는 몽상이었습니다.

게다가 89년 말 동유럽의 국가자본주의 정권들이 대중봉기로 무너짐에 따라 남한 좌익들은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끝없는 혼동의 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독자적인 조직 건설의 필요성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이리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돌이켜보건데 70년대 중엽부터 80년대 말까지 15년 동안에 제가 배운 것보다 정치조직 활동을 한 지난 2년 동안에 배운 것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인생 자체를 새로 산 느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우선, 거의 15년을 고민하고 방황하면서 추구했던 인간 삶의 진실이 오직 실천적 정치활동 속에서만 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울산 현대자동차 해고노동자인 정동석 동지가 모든 어려움을 이기면서 모범적인 사회주의 노동자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또, 일곱 살짜리 애를 가진 홀어머니인 박매령 동지가 여성으로서 당하는 억압과 사회주의자로서 당하는 법적인 탄압을 동시에 견디어 낸 것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이 있습니다. 또, 방 하나에서 여섯 식구와 살면서 인권 변호사 댈 비용 50만 원조차 없는데도 두 번씩이나 연행되어 구속된 곽곤수 동지로부터, 그리고 경찰 연행 후 실수로 한 자백이 다른 동지의 구속을 위한 증거로 이용된 데 대한 자책감으로 자살을 기도했다가 다행히도 생각을 고쳐먹은 동지로부터 의지력과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직접 탄압을 받아보면서 아직 대학생들이 다수이고 노동자들은 소수인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이 사회의 피착취·피억압 계급과 정서적 차원에서도 일체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또, 검찰 탄압 이전에만 해도 우리의 항의가 반향을 못 받아 섀도 복싱을 하는 느낌을 가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검찰의 카운터펀치를 맞기 시작한 뒤부터 우리가 투쟁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는 무죄입니다

이제 저는 대한민국의 지배자들이 얼마나 자신감이 없고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가를 예증하면서 모두진술을 마치려 합니다.

먼저 자신감의 결여 문제를 살펴봅시다. 전 세계에서 국제사회주의 사상을 지침으로 삼고 활동하는 조직들 가운데 남한 IS처럼 원초적 탄압을 받는 조직은 없습니다. 미국의 ISO, 즉 ‘국제사회주의자조직’ 영국의 SWP, 즉 ‘사회주의노동자당’ 그리고 독일의 SAG, 즉 ‘사회주의노동자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바로 얼마 전에야 억압적 정부가 물러난 폴란드와 그리스와 브라질, 그리고 심지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조차 우리의 자매 조직들은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다 똑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데 왜 유독 남한 정부만이 우리를 탄압하는지, 더구나 앞에서도 말했고 검찰 자신이 잘 알다시피 우리가 북한 정부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닌데도 왜 탄압하는지, 저로서는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자신감 없는 자유민주주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남한의 지배자들이 자신감 없을 만도 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이 한결같이 현 상황을 총체적 난국으로 규정한 것을 보아도 이 점이 드러납니다. 4년째 경제 위기가 지배자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번의 불황은 남한 자본주의가 장기 대호황을 누리던 지난 30년 동안의 사이사이를 장식하던 크고 작은 불황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무엇보다 전체 인구 자체가 처음으로 노령화하고 있고 경제 활동인구와 노동력인구 및 취업인구가 한결같이 노령화하고 있습니다. 30년의 젊음을 누린 끝에 남한 자본주의도 서구 자본주의처럼 이제 노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배자들은 74∼75년 불황 때처럼 석유값을 핑계댈 수도 없습니다. 79∼81년 불황처럼 광주혁명과 석유값을 함께 핑계댈 수도 없습니다. 노동자 임금을 핑계댈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부기관인 한국은행의 92년 상반기 기업경영분석은 임금상승률이 전해보다 떨어졌는데도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그 근본 원인은 매출 부진 자체에 있음을 시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플레를 임금인상 탓으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은행이 77년부터 91년까지 지난 15년 동안 물가상승을 주도했던 요인은 통화량의 공급 증대로서, 인플레에 80% 이상의 영향을 미쳤다고 시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같은 통계에서 한국은행은 임금인상이 노동생산성을 향상시켜 물가인상 효과를 부분적으로 상쇄시키는 효과를 냈다고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이번 불황의 구조적·영구적 성격은 금리 문제로 대표되는 금융체제 자체의 만성적 불안정 상태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김영삼의 ‘한국병’은 불치병입니다. 물론, 일시적인 증세 완화 또는 병세 호전이야 여러 번 있겠지요. 그러나 병의 근본적 원인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원인이 국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경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계경제는 어느 국가도 규제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계 국가가 없고 또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죠.

결국, 남한 지배자들에게 만약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실제로 닥쳐 있다면, 그것은 국제사회주의자들 자체라기보다는 경제 위기의 부담을 떠맡지 않으려 저항하는 노동자 계급일 것입니다.

여기서 지난 대통령 선거 바로 이틀 전 조간신문에 폭로된 부산기관장 김영삼 지원 논의 석상에서 김기춘 전 검찰총장 및 법무부장관이 한 말은 인용할 만한 것 같습니다.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 “팔이 안으로 굽는 것같이…상공회의소 회장은 다 여당입니다” 하고 말하자 김기춘은 “그래요. 잘못되면 혁명적 상황이 와서 전부 끌려 들어가야할 판인데 여당 해야지 그럼 어떻게 합니까?” 하고 덧붙였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이 아니라 국내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적임을 밝히지 않는 남한 정부의 솔직성 결여가 문제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신감 결여에서 직접 비롯하는 것입니다.

기원전 5∼4세기에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구가하던 때, 과두정치였던 이웃 스파르타의 지배계급은 자기 자신의 노동인력인 국가농노들(헬롯트)에게 해마다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저는 이 나라의 지배자들도 스파르타 지배자들처럼 솔직하게 자신의 고용 노동력인 노동자들에게 “너희들은 우리의 적이다(또는 “북한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 우리의 적이다” 하고 해마다 선전포고를 하고 그리고 나서 비로소 국제사회주의자 녀석들은 자신의 적을 이롭게 하는 얄미운 놈들 또는 큰불을 낼 수도 있는 작은 불씨이므로 같이 처벌받을 줄 알라고 우리에게도 매년 함께 선전포고하는 것이 어설프게 아테네 흉내를 내는 것보다 자신들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임을 조언하고 싶습니다.

이제 저는 단 한마디로 최종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던졌던 물음들 가운데 단 한 가지만에라도 검찰과 법원이 옳든 그르든 명확한 답변과 함께 제게 유죄를 구형 또는 선고한다면 저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면, 저는 무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