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역사를 피로 물들여 온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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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혁명들은 제국주의 질서를 위기에 빠뜨렸다.
이것은 지난 1백년 동안 서방 열강의 계획에서 중동 지역 통제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강은 이 지역을 통제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19세기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력을 이용해 중동 일부를 점령했다. 그들은 직접 점령하지 않는 지역에는 자기 말을 잘 듣는 정권을 세웠다.
영국은 이 지역을 이용해 제국의 범위를 동쪽으로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1882년 이집트를 점령했다.
제1차세계대전 때까지 중동 나머지 지역은 서방의 직접적인 통제 바깥에 있었다.
나중에는 이탈리아도 제국주의 쟁탈전에 뛰어들어 1911년에 오늘날 리비아가 된 지역을 점령했다.
오늘날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을 구성하는 지역은 당시 터키에 근거를 둔 오스만 제국의 수중에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 동안에 영국은 아랍 지도자들을 설득해 당시 독일과 연합했던 오스만에 맞선 항쟁을 벌이도록 했다. 그 대신에 영국은 이 지역에 독립 아랍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영국 지도자들은 아랍 지도자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영국 지도자들은 이 지역의 석유에 관심이 있었다.
이간질
서방 기업들은 석유가 매장된 것으로 예측되는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면서 지역 통치자들에게 쥐꼬리만한 돈을 지불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열강은 자신의 도둑질과 지배를 그럴듯한 이름으로 감추려 했다. 그들은 ‘해방’이나 ‘자치’같은 단어로 자신의 제국주의적 개입을 정당화하려 했다.
프랑스와 영국 관리들은 지배를 쉽게 만들기 위해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 기독교도와 무슬림을 서로 이간질시켰다.
1916년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이 지역을 나눠 먹었다. 그들은 지도 위에 선을 그었고, 이것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들은 자를 대고 지도에 선을 그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중동 나라의 국경이 그토록 곧은 것이다!
제국주의 나라들 사이의 이런 거래는 영국과 프랑스 둘 다 진정한 독립 아랍 국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줬다.
이제 중동 지역의 석유는 국제 외교를 움직이는 윤활유가 됐다.
이렇게 제국주의 세력이 자기 마음대로 정치 지도를 작성할 때마다 저항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이라크와 이집트에 친영 왕정을 수립했지만 몇 년 뒤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영국 정부는 부족장들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들은 나중에 지역 세금 징수자이자 ‘법질서’의 수호자를 자임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를 지지하는 이 부족장들도 1920년 국제연맹이 영국 정부에게 이라크에 대한 신탁통치권을 부여했을 때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영국군은 이라크 항쟁을 가까스로 진압했고 이집트의 시위와 파업을 분쇄했다.
식민지 관료들은 두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대중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동시에 토착 엘리트들과 동맹을 수립했다.
정당성을 잃은 아랍 지배자들은 오랜 전통이 있다. 그들은 제국주의자들이 개입할 때마다 점령자들과 협력했다.
1920년대에 이르면, 중동 지역에 엄청난 석유가 매장돼 있다는 점이 명백히 드러났다. 석유는 세계 자본주의의 핵심 상품이 되고 있었다.
1950년대 영국 외무장관 셀윈 로이드는 서방 열강이 원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무슨 수를 쓰든 이런 유전 지대는 서방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협하는 것이 나타나면 우리는 무자비하게 개입해야 한다.”
제2차세계대전 후 미국이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세력이 됐다. 미국은 중동을 통제하려고 두 가지 전략을 추구했다.
하나는 아랍 지배자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아랍 나라들의 대중적 불만이 폭발해 아랍 지배자들이 서방에 도전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거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는 혁명으로 발전할까 두려워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가말 압둘 나세르가 서방 정부에 도전하자 이런 두려움은 현실이 됐다. 1979년 이란 혁명이 미국의 핵심 동맹인 샤를 쫓아냈을 때 그 두려움은 한층 커졌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에서 ‘경비견’ 구실을 하면서 나세르의 도전을 꺾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고, 여전히 미국의 전략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서방 열강은 지배를 유지하려고 이 지역에서 몇 차례 전쟁을 벌였다. 1956년 수에즈 위기 때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분쇄하려 개입했지만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연합군은 굴욕을 맛봤다.
그러나 나세르와 다른 아랍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혁명의 폭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서방 제국주의에 위협이 됐기에 1967년 이스라엘은 6일 전쟁을 벌였고, 아랍군대를 무찔렀다.
패배한 후 아랍 정권들은 서방 제국주의와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친미 독재
이집트와 다른 나라들은 미국과 거래하고 이스라엘과 타협했다. 그렇게 하길 거부한 정권들은 고립되고 군사 공격을 받았다. 미국이 칭한 “아랍 전선”은 깨졌다. 결국 강력한 압박에 직면해 이 지역 국가들은 친미 독재 국가들로 변신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채택했고, 석유에서 얻은 부가 몇몇 특권 가문 손에 집중되면서 아랍 사회에서 양극화가 심화됐다.
그리고 중동은 여전히 [서방 제국주의에게] ‘역사상 최대의 물질적 선물’이다.
그래서 서방 열강은 여전히 친서방 국가를 후원하거나 자기 이익을 지키려고 개입하는 것이다.
1991년과 2003년 이라크 전쟁과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략은 미국 제국주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 전쟁들은 미국 제국주의의 한계를 보여 줬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여전히 석유에 집착한다. 따라서 석유 자원을 강력하게 통제하려 한다.
올해 혁명이 일어나 상황을 유동적으로 만들기 전까지 대다수 중동 나라들은 미국 제국주의의 강력한 동맹이었다.
아랍 지배계급은 세계 자본주의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다. 몇몇 아랍 독재 정권들은 리비아 개입을 승인하는 유엔 결의안을 찬성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일부 나라들은 이미 바레인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려고 파병을 했다.
서방의 리비아 유린 역사
리비아 현대사에도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1911년 이탈리아는 ‘아프리카 쟁탈전’의 일환으로 오늘날 리비아 지역을 점령했다.
1934년 이탈리아는 이 식민지의 공식 명칭을 리비아로 정했고 강력한 폭력을 사용해 통치했다. 이탈리아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리비아를 통치하게 됐다. 리비아는 1951년 친영·친미 이드리스 국왕 아래 독립국이 됐다. 나중에 리비아에서 상당량의 석유 자원이 발견됐다.
무아마르 카다피는 1969년 이드리스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그는 미국과 영국군 기지를 폐쇄했고 외국계 석유 회사와 기업을 부분적으로 국유화했다.
서방은 카다피를 적으로 봤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1986년 카다피를 암살하려고 전투기를 보냈다. 미군 미사일은 빗나갔고 트리폴리 주택가를 파괴해 무고한 1백 명을 죽였다.
2년 뒤 여객기 팬암 103호가 로커비에서 폭발해 2백70명이 죽었다. 1991년 걸프전을 앞두고 서방은 리비아를 비난했다.
오랫동안 리비아를 고립시킨 서방 정부들은 2004년 경제 제재를 해제했다. 서방 기업들은 이 나라의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였다. 2007년 영국 석유 기업 BP는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리비아의 국영석유공사와 석유 탐사 계약을 체결했다.
2008년 영국이 리비아에서 수입하는 석유량은 66퍼센트 증가했고 리비아에 대한 수출은 50퍼센트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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