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국가란 무엇인가》:
정의로운 자본주의 국가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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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참여당 유시민의 새 책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정부를 오랫동안 경험한 한국에서는 인기 없을 국가라는 주제를 다룬 책으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큰 관심이다.
그 요인은 우선 유시민이라는 인물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1980년대 후반 진보적 대학생치고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를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처음 국회의원으로 당선한 2003년 4월, 캐주얼 차림으로 등원해 보수적 국회의원들을 조롱하던 모습을 보며 통쾌해 했을 사람도 꽤 많을 것이다.
더 큰 요인은 지금이 이데올로기적 전환기, 또는 혼란기라는 점일 듯하다. 2008년 자본주의 심장부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로 세계가 출렁일 때, 그 전 30년 가까이 득세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도 함께 흔들렸다.
작은 정부가 최선이라던 주장은 쏙 들어가 버렸고 다시 국가의 구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국가 개입을 강하게 주장하는 케인스주의자 장하준의 책이 선풍적 인기를 누린 상황을 본다면 《국가란 무엇인가》의 성공은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시민은 ‘진보적 자유주의’를 지향한다고 설명한다. 진보적 자유주의 국가론은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의 토대 위에 … 목적론적 국가관[칸트]을 결합한 이론”이다. 이는 이 책의 부제 “국가로 하여금 정의를 세우게 하라” 하는 말로 집약된다.
그는 한때 사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기도 한 칸트를 부활시켜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국민참여당 존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려 한 듯하다.
그러나 유시민의 진보적 자유주의로는 아무래도 노무현 정부의 한계를 제대로 넘어서지는 못할 것 같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념(자유·평등·박애)에 정의(定義)를 더했지만 자유주의 자체의 한계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자유가 중요하다면서 마르크스주의가 평등만 강조하고 자유를 무시한다고 비판하지만 이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마르크스는 어떤 자유주의자보다도 자유를 더 중시한 인물이다. 마르크스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를 추구했다.
마르크스가 자유주의를 비판한 것은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는 자유주의의 이념이 충분히 구현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노동자에게는 착취당할 자유는 있지만 착취당하지 않을 자유는 없다. 자본가의 착취에서 벗어났을 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빈곤과 절망 뿐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
유시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을 빌어 정의를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자유와 마찬가지로 정의도 계급으로 나뉜 사회에서는 온전히 구현될 수 없다. ‘정의를 실현하자’고 외치기 전에 ‘누구의 정의인가’를 묻는 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다.
2009년 쌍용차 노동자들의 점거 파업을 떠올려 보자. 당시 쌍용차 공장에서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이해관계가 충돌했다. 해고를 막아 생존권을 지키려는 노동자들과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새로운 매각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자본을 지키려 한 경영진의 이해관계.
이명박 정부는 살인진압은 자본가들에게는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조처였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정반대의 결과를 뜻했다.
유시민이 비판하려 한 마르크스는 국가를 본질적으로 지배계급의 도구로 봤다.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한 곳에서는, 정확히 말하자면 계급투쟁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발전하기 전까지는 이 점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지만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노릇을 한다.
국가의 요체는 관료제와 상비군이다. 이 집단은 선출되지 않고 대중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들로 구성돼 있다. 계급 질서가 흔들린다고 판단될 때는 어김없이 이 집단이 나선다.
가장 비극적인 사례는 1970년대 초 칠레의 경험이다. 당시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칠레 군부는 선거를 통해 당선한 아옌데 정부를 타도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진정한 자유와 정의를 쟁취하려면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고 그 자리에 대중이 아래로부터 건설한 대안적 권력 기구를 세워야 한다. 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 코뮌을 보고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두고 유시민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혁명주의자’들이 사회혁명에만 관심을 보이고 “보수 정파와 자유주의 정파의 정치적 대결에 냉정하고 관조적인 태도를 보인다”며 공격한다.
그러나 파시즘에 맞서 가장 일관되게 싸운 것도 당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는 점만 떠올려 봐도 유시민의 주장이 근거없는 비난임을 알 수 있다.
진정한 권력이 선출되지 않는 자들에게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은 의회 장악이나 대통령 당선만으로는 체제 내에서 개혁을 이루는 데서도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라는 귀중한 교훈을 준다.
이를 극복하려면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 필수적인데 유시민이 진보적 자유주의론으로 두둔하려 하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가 이를 잘 보여 준다.
노무현 정부는 한편으로는 대중의 개혁 염원을 충족해야 한다는 압력,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수호해야 하는 압력 속에 끊임없이 동요하다 결국에는 이렇다 할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좌초했다.
선출되지 않는 권력
여기에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우파와 지배계급 주류의 반발이다.
그들은 노무현 정부 집권 초기부터 반발했다. 알량한 개혁 조처에도 참지 않았다. 대통령 입에서 “이 정도면 막 가자는 거지요” 하는 말까지 나왔다.
결정판은 2004년의 대통령 탄핵 시도였다. 집권 1년여 만에 대통령을 날려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노무현은 이런 반발에 무기력하게 굴복했다.
유시민은 노무현 정부의 좌초를 두고 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노무현의 후퇴와 우경화는 주체적 선택이기도 했다. 이것이 둘째 요인이다.
탄핵 시도에 맞서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우파의 준동을 저지하고 노무현에게 다시 힘을 실어 줬다. 뒤이은 총선에서 노무현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열린우리당은 국회에서 다수파가 됐다.
노무현 정부가 대중의 힘을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면 우파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국가보안법 폐지 같은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을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자신을 제거하려 한 자들보다 자신을 구해준 운동과 더 거리를 두려 했다. 되레 노동자·민중의 염원을 짓밟았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구속된 노동자가 1천 명이 넘는다. 거의 이틀에 한 명씩 구속한 셈이다. 그 중 대다수가 비정규직 노동자다. 정부의 탄압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가 열 명이 넘었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보내자”던 노무현 정부는 결국 국가보안법의 토씨 하나 바꾸지 않았다. 되레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국가보안법 관련 구속자가 1백40명이 넘었다.
국가보안법 개폐가 전국적 쟁점으로 떠올랐을 때 ‘자유주의자’ 유시민은 한나라당과 연정을 추진하면서 국가보안법 문제를 2~3년 미룰 수 있다고도 했다.
대중의 삶에 큰 악영향을 미칠 한미FTA를 폭압적으로 추진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한마디로 노무현 정부는 거듭 거듭 “좌측 깜박이 켜고 우회전했다.”
노무현 정부의 거듭된 배신과 우경화 행보는 우파의 입지를 강화해 줬고, 이것이 우파의 부활과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유시민은 막스 베버를 인용하며 책임윤리를 강조한다. “정치인은 결과로 책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해 성찰하지 않으면서 “책임” 운운하는 것은 공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