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의 무덤, 뉴타운 사업:
“파리 목숨을 거부하고 투쟁 깃발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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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명동성당 맞은편 골목에서 2008년 6월부터 지금까지 티베트 음식과 인도·네팔 음식을 팔고 있습니다. 저는 네팔 국적의 티베트인과 결혼해 이곳에서 장사해 왔습니다. 개업한 날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쉰 날이 단 하루도 없고, 가게 유지가 어려웠던 초창기에는 남편이 다른 사람의 가게에서 먼지 마셔가며 일 도와주고 돈 벌어 오면 그걸 보태서 한 고비 넘기고 두 고비 넘기며 버텨 왔습니다.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 여성이라 대출도 어려웠고, 대출을 받더라도 금리가 높았으며, 아이가 둘이고, 장애가 있는 엄마를 모셔야 했습니다.
“빛 좋은 개살구.” 장사를 하며 버텨 온 지난 3년을 돌아보면 정말 그랬습니다. 그래도 수익금의 일부와 작은 후원의 손길을 티베트 난민촌 아이들에게 전해 주며 힘들어도 보람있다고 스스로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포탈라를 기억해 주고 다시 찾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26일 등기 한 장을 받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뜯어 봤습니다. 저희의 생존을 위한 노력·꿈·희망을 포크레인으로 부숴 버리고 불도저로 밀어서 27층짜리 금융센터를 만들 테니 5월 31일까지 나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봐도 사실이었습니다. 단 한 마디, 아니 전화 한 통조차 없었습니다. 달랑 종이 한 장으로 쳐서 죽일 수 있는 저희는 파리였습니다.
쥐똥만큼의 이주 비용도 아까우니, 보증금 받고 꺼지라는 겁니다. 이 가게를 차리면서 지금까지 한 2억 원이 사라졌습니다. 보증금은 2천만 원입니다. 우리의 전 재산이 쓰레기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1989년,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면서 생계 유지를 위해 노점에서 떡볶이를 파셨습니다. 노조 활동으로 회사에서 잘리고 취직도 못하는 마당에, 그 보잘것없는 포장마차는 가족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 포장마차를 구청이 와서 때려 부쉈습니다. 올림픽을 유치한 나라에 맞지 않는 노점상이라며…. 아버지는 독재정권에 맞서 분신하셨고, 57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20년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인정됐고 저는 그 돈을 들여 이 가게를 차렸는데, 이제 저도 강제 철거를 눈 앞에 두고 있으니 이런 아이러니를 누구에게 말해야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까요?
저희 가게를 비롯한 열아홉 집이 동시에 통보를 받았습니다. 용산참사 이후 법이 바뀌어서 사업 인가가 나면 세입자의 이주 비용을 건물주가 주게 됐고, 지금 건물주는 저희 가게 밑에 있는 다른 세입자들을 강제집행했던 시행사입니다. 민간자본을 들이는 도시환경정비사업이지만 그 사업을 허가하고 계획하는 것은 구청이며 서울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네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열다섯 집이 모여 대책위를 만들었습니다. 권력과 자본이 한통속이 된 이 사업에서 세입자 열다섯 명이 살아남기 위해, 투쟁의 깃발을 올려야만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강제로 내쫓겨야 하는 삶의 터전밖에 없습니다. 힘을 보태 주십시오. 몇 십년 전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세상을 바꿀 힘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