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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 파업 일기 (6월 15일~17일):
“야간노동 없애자는 게 죄입니까?”

이 글은 유성기업 아산 공장 생산1과 조합원이 쓴 파업 일기다. 〈레프트21〉은 앞으로 이 동지의 일기를 연재한다.

6월 15일 출근 투쟁 첫날

회사는 우리더러 “개로 살라”고 하는가

오늘은 집회가 아닌 출근을 위해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다.

옷도 갈아 입고 조끼도 벗고 ‘단결 투쟁’이 적힌 머리띠도 풀고…. 나름 깨끗하게 출근을 준비하긴 했는데,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이 맘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노조를 깨려고 작심을 한 회사가 그렇게 쉽게 [집단 복귀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줏대 없는 사장 유시영의 곁에 대통령도 무서워하는 현대 자본과 자본의 피를 빨아 먹는 컨설팅업체가 있으니 쉽사리 문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난 어떤 기대도 할 수가 없었다.

오전 8시, 조합원들은 오직 출근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회사 앞에 섰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컨테이너와 용역들이 출근길을 막았다.

‘심야노동 철폐’를 외친 우리는 5월 18일에 사측의 부당한 직장폐쇄로 이유 없이 밖으로 내몰려야 했다. 다시 [점거파업을 벌이며] 공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도 우린 기계 하나 건들이지 않았고 유리 한 장 파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대차의 생산이 끊긴다는 이유로 경찰력에 의해 6일 만에 다시 공장 밖으로 밀려나야 했다.

저들은 공장 점거가 ‘사유재산 침탈’이라며 우리에게 죄를 묻지만, 진정 원인 제공을 한 것은 사측이 아닌가? 그런데 왜 사측과 경찰은 우리에게만 죄를 묻고 있는 것인가? 대체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선별”을 말하며 함께한 조합원을 해고하려 하고, 갖은 협박으로 우리에게 개로 살라 말하는가?

회사는 우리에게 무슨 “진정성”을 원하는가? 먼저 들어간 복귀자들처럼 ‘나는 개다’라고 짖어야 한단 말인가? ‘제가 잘 못 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라며 무릎이라도 꿇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이런 사측의 부당한 요구를 수용할 수 없기에, ‘일괄 복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정당한 출근을 사측은 용역깡패로, 정부는 경찰력으로 막아섰다. 관리자 놈들은 용역깡패들 뒤에서 허연 이빨만 드러내고 서 있다. 용역깡패의 비아냥거림과 더러운 미소도 보인다.

힘없는 우리는 따가운 아침 햇볕 아래서 문이 열리길 기다렸지만, 문은 열리질 않았다. 차마 돌아서지 못한 우리는 아쉬움에 담벼락 저편 회사 안 쪽을 바라보다 10시가 다 돼서야 무거운 발걸음을 하우스로 옮겼다.

조합원들이 교육을 받고 점심을 먹을 무렵, 굴다리에서 한 조합원의 외침이 들렸다. 하우스에 대기 중이던 조합원들은 다급한 외침을 듣고 쏜살같이 굴다리로 달려갔다.

굴다리 밑에 도착했을 때, 용선이 형님이 입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저 멀리 공장으로 돌아가는 용역깡패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노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굴다리 위에 있던 조합원들이 카메라로 우리 쪽 하우스를 훔쳐보는 용역 두 명에게 “여기 있지 말고 내려가라”고 하자, 회사 안에 있던 깡패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 달려나와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용역깡패 대장이라는 자가 팔꿈치로 용선 형님의 얼굴을 가격했다.

이들은 하우스에 있던 조합원들이 소식을 듣고 합류하자 바로 회사 안으로 달아났다.

오후 집회가 끝나고 또다시 짙은 어둠이 사방을 감싼다. 굴다리 위에서 저 아래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니 그곳에서 나오는 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

6월 16일 출근 투쟁 둘째 날

정동영 의원 납시오

출근 투쟁 둘째 날, 지난밤 간단한 닭과 술로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늦게 잠이 든 탓인지 어느 때보다 [몸과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출근을 위해 머리도 감고 이도 닦고 옷도 깔끔하게 입었다.

그러나 오늘도 정문은 여전히 컨테이너와 용역으로 막혔다. 담 너머에서 회사를 바라봐야 하는 현실에 마음이 또 울적했다.

우리는 아예 정문 앞에 눌러 앉았다.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돌아서지 않겠다는 것이고, 우리의 출근을 막았으니 너희의 출입도 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낮이 되자 햇볕은 따가움을 넘어 뜨거워졌다. 태양이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구자 이젠 말조차 귀찮아 용역깡패들과의 다툼은 수그러들었고, 공장 담 뒤로 용역깡패와 편하게 이야기하는 조합원이 있는가 하면, 시원한 곳을 찾아 아예 누워 버린 조합원도 있었다.

일부 조합원들은 하우스에서 지게차로 점심을 날랐다. 메뉴는 김만 넣은 주먹밥과 시원한 오이냉국이었다. 우리는 이것도 맛있게 먹었다.

휴식을 조금 취할 무렵, 민주당 정동영 의원이 직장폐쇄 31일 만에 처음으로 우리 조합원 앞에 납시었다. 철없던 한때 대단해 보였던 그이지만, 이젠 신뢰보다 빈껍데기처럼 초라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 무엇도, 그 어떤 작은 기대도 할 수가 없었다.

형식적인지는 몰라도, 그는 우리 지도부로부터 상황 설명을 들은 뒤 공장으로 들어갔다. 공장장 ― 그의 이름조차 부르기가 싫다 ― 을 비롯해 그의 꼬붕들이 관리동 사무실에서 주르르 나와 노조 지도부는 거부한 채 정동영과 그의 측근들만 맞이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회사와 면담을 마친 정동영은 우리에게 일괄 복귀를 약속한 뒤 조합원들과 악수를 하며 위로하고는 하우스를 떠났다. 정동영에게 기대를 걸진 않았지만, 정말 모든 사심을 버리고 심각하게 고민만이라도 한 번 했으면 좋겠다는 맘이 간절했다.

6월 17일 출근 투쟁 셋째 날

담 너머로 제품 나르던 직원이 부상을 입다

이글거리는 한낮의 뜨거운 불볕더위에도 정문을 틀어막은 컨테이너 박스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숨이 턱턱 막힌다. 땀이 주르르 흐른다.

50미터 떨어진 공장에서 기계 소리가 들린다. 컨테이너에 막혀 흐느끼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저 기계도, 저 소리도 20~30년을 우리와 함께했다.

회사는 우리가 빠진 밤이 되면 도둑마냥 컨테이너를 열고 출·퇴근을 하고 제품을 출하했다.

이제껏 해가 떨어지고 늦은 저녁이 되면 하우스로 철수를 했지만, 이젠 사측의 도둑 같은 ‘자유로운 행동’을 통제하려고 24시간으로 교대를 시작했다. 또 사측과 용역들의 도발을 우려해 아예 사수대 거점을 굴다리 밑으로 옮겼고, 바닥에 단열제를 깔아 자리를 폈다. 비닐로 벽을 만들어 차도를 막으니 제법 괜찮은 방이 되긴 했지만, 사수대 전부를 수용하기가 비좁은 탓에 차선 하나까지 잡아 자리를 펴야 했다.

굴다리 밑은 유일하게 그늘과 시원한 바람이 있는 곳이긴 하지만, 차가 지날 때마다 뿜어내는 매연에 콧속은 까맣게 기을고 하얗게 퍼지는 먼지로 목은 따갑고 입안엔 까슬까슬한 게 씹혔다. 자동차의 소음과 라이트 빛도 우리를 더 피곤하게 했다.

늦은 시간이면 철수하던 조합원들이 교대로 자리를 지키자, 당황한 사측은 다시 도발을 시작했다. 컨테이너 뒤로 퇴근하려는 차들이 줄을 섰고, 정문엔 용역들이 배치됐다.

사측은 컨테이너로 우리를 밀어버리겠다며 위협했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고 컨테이너를 열면 다같이 뛰어들어갈 태세를 갖췄다. 결국 사측은 문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소란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119 구급차가 도착했다. 현장 안에서 누군가가 다쳤다는 것이다.

119 대원이 회사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들것에 실려 나온 이는 현장 직원이었다. 실려 나온 직원은 엉덩이 부위에 피가 흥건히 젖은 붕대를 감고 있었다. 분명 일하다 다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철수하지 않고 정문을 통제하자, 회사는 정문이 아니라 옆 회사의 넓은 공간을 빌려 그곳에 차를 배치하고 담장 뒤로 무거운 제품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쳐놓은 철조망에 현장 직원이 떨어져 주저앉은 것이다. 참 여러 가지로 논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