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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정치와 해방 전략 —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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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물음과 관련이 있다. 정체성은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을 자각하거나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특징인 것이다.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집단들이 자신들의 특수한 정체성, 즉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에 기초해 싸우는 운동의 전략을 의미한다. 차별 반대 운동에서 정체성 정치는 매우 폭넓게 받아들여진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차별받는 집단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그 정체성을 중심으로 단결해 차별에 맞서자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의문과 비판도 늘었다. 지난 대선 때 신지예 씨가 국민의힘 윤석열 선본에 간 일,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젠더의 숙명여대 입학에 반대한 일 등을 계기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오늘 나는 정체성 정치의 강점과 약점을 살펴보고, 차별에 맞선 효과적인 전략은 무엇인지 얘기해 보려 한다.
우파적 정체성 정치?
먼저, 정체성 정치를 좌우 구분 없이 쓰면 혼란을 낳는다는 점부터 짚고 넘어가겠다.
차별받는 사람들뿐 아니라 우파들도 정체성 문제를 이용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준석 등 우파가 20대 남성 정체성을 대표하는 양 나서는 것이나, 베이징 올림픽 한복 논란에서 ‘한민족’ 정체성을 부추겨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그렇다.
그래서 우파가 정체성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과 좌파의 정체성 정치를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파의 ‘정체성 정치’는 차별로 노동계급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해 반동적 의제를 강화하고 기성 사회 시스템을 지키려 한다.
반면 차별받는 사람들의 정체성 정치는 차별에 대한 반발이자 차별 반대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를 좌우 구분 없이 쓰는 것은 부적절하고, 좌파적·진보적 운동에 대해서만 쓰는 것이 좋겠다.
정체성 정치의 강점
정체성 정치는 서구에서는 1970년대 등장해 1980년대에 크게 득세했다. 한국에서도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좌파들이 정체성 정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정체성 정치는 공통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차별받는 개인들이 함께 모여서 집단으로서 힘을 느끼게 하고, 행동에 나서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 정체성 정치는 강력한 단결의 정서를 만들어 내고, 그 힘을 통해 실제 중요한 변화들을 이뤄 내기도 한다.
1960~197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나 성소수자 운동에서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2018년 불법촬영에 항의한 ‘불편한 용기’ 시위가 정체성 기반 정치 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라고 할 만하다.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인 ‘비웨이브’도 마찬가지다. 이 운동들은 수많은 여성을 결집시켰고 상당한 성과도 거뒀다.
그런데 이 시위의 주최 측은 오로지 여성만이 여성 차별을 이해하고 그에 맞설 수 있다는 전제에 따라 시위 참가 대상을 여성으로 엄격히 한정했다.
그러나 ‘불편한 용기’와 ‘비웨이브’는 최근의 두드러진 사례일 뿐 한국의 주류 여성운동도 언제나 ‘여성 연대’를 호소해 왔다.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도 퀴어 퍼레이드를 개최하며 이것이 성소수자들의 축제임을 강조한다.
정체성 정치의 한계
이처럼 정체성 기반 정치는 특정 조건에서 강력한 단결의 정서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한계도 있다.
첫째, 정체성 정치는 특정한 차별을 받는 당사자들(만)이 그 차별에 맞선 투쟁을 해야 한다고 본다. 차별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저항하기를 강조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성이 운동 주도나 참여의 기준이 되면, 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동참시켜 투쟁을 더 크고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어려워진다. 정치가 취약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차별받는 집단을 고립시키고 이간질해 각개격파하기 때문에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광범한 연대는 운동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요소다. 남성 노동계급을 광범하게 동원한 아일랜드의 낙태권 투쟁이 그런 사례다.
그런데 정체성 정치는 연대의 구실을 중요하게 보지 않거나, 연대가 중요하다고 말할 때조차 당사자성을 앞세우며 그 효과를 반감시킨다.
둘째, 당사자가 운동 참여의 기준이 되면, 누가 당사자인가가 중요해진다. 특정 정체성 안에 누가 포함되고 누가 포함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여성은 어디까지인가, 트랜스 여성은 여성인가, 양성애자는 진정한 성소수자라고 할 수 있나 등등처럼 말이다.
트랜스젠더의 숙명여대 입학을 둘러싼 논란은 트래스젠더가 “진짜 여성”인가 식의 접근이 운동을 쪼개고 약화시킬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줬다.
셋째, 정체성을 단결의 기준으로 삼으면, 그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는 집단은 차별 개선에 관심이 없고 심지어 차별에서 득을 본다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일반을 여성에 대한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고, 성소수자 운동 내에서는 흔히 이성애자의 ‘특권’을 문제 삼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평범한 사람들을 도덕주의적으로 비난하고 훈계해 반발감을 사고 이반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정체성 정치가 차별을 개인의 경험 문제로 협소하게 보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는 차별에서 득을 보는 것이 누구인지 잘못 짚어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을 비껴가고, 오히려 운동의 분열과 파편화를 낳을 수 있다.
정체성 정치가 운동의 분열과 파편화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 준 극단적인 사례는 2018년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예멘 난민 입국에 반대한 것이다.
이들은 “여성만 챙긴다”는 협소한 정체성 정치에 기반해서 전쟁을 피해 한국에 온 난민들을 거부했다. 이슬람이 여성 차별적이라는 편견에 더해서 난민들이 주로 남성이라는 이유로 그랬다.
이 사례는 차별받는 집단인 여성이 또 다른 차별받는 집단인 난민을 배척한 것으로, 그 결과 차별적인 사회 시스템과 권력자들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마지막으로, 공통의 정체성으로 모이는 것만으로는 ‘어떻게 해방을 쟁취할 것인지’ 전략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운동 내에는 다종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체성을 중심으로 단결한 운동은 초기에 광범한 단결을 이루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운동의 향방을 두고 첨예하게 분열하기도 한다.
예컨대 ‘불편한 용기’ 시위의 기세에 밀려서 문재인 정부가 일부 양보 조처를 내놓으며 운동을 시스템 안으로 흡수하려 했을 때, ‘불편한 용기’ 참가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크게 일었던 것이 한 사례다.
당시 구호와 시위 장소를 둘러싼 갈등은 문재인 정부의 일부 양보에 운동이 어떻게 대처하고 어디로 나아갈지를 둘러싼 이견의 표현이었다.
흔히 정체성 정치 운동의 주도자들은 ‘정치 배제’를 내세워 전략의 차이를 가리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소되지는 않는다.
차별과 계급
정체성 정치는 차별이 계급과 무관하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차별 문제에서 계급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물론 인종차별이든, 성차별이든, 성소수자 차별이든 차별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우리는 그 차별이 누구를 향하든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
차별 문제에서 계급이 중요한 하나의 이유는, 사람들이 차별을 경험하는 방식에 계급이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신세계 백화점, 호텔신라, 마켓컬리를 운영하는 부유한 여성 CEO들도 성차별을 겪어 봤을 테지만, 그들과 그들이 고용한 노동계급 여성의 삶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들에게는 차별에 맞선 여성 연대보다 중대재해법 반대를 위해 남성 자본가와 정치인들과 동맹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계급에 따라 기존 질서 수호의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차별 문제에서 계급이 중요한 더 핵심적인 이유는, 모든 여성, 모든 성소수자의 단결만으로는 차별을 근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힘을 동원해야 비로소 가능하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얘기하겠다.)
차별에서 계급 문제를 중요하게 보느냐 마느냐는 운동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계급 분단선을 무시하면 차별받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기업인이나 국가 관료 등 지배계급 일부와 동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정체성 정치는 기성 체제에 편입되고자 하는 중간계급 여성·성소수자·소수인종이 활용하기에 유용한 전략이다.
한국의 주류 여성운동도 여성 정치인이나 권력자들과의 관계가 밀접하다. 특히 여성단체연합은 민주당이나 국가 관료와 오랫동안 유착해 왔다. 여성운동 지도자들은 대기업과 공동 사업을 하거나 후원을 받아 왔다. 여성의당이 지지난해 여성 재벌들에게 후원금을 호소해 화제가 된 것은 두드러진 사례일 뿐이다.
성소수자 운동의 주류가 퀴어 퍼레이드 등에서 미대사관 같은 제국주의 국가기관이나 구글 같은 다국적 기업과 우호적 관계를 맺어 온 것은 또 다른 사례다.
그래서 정체성 정치에 기반한 운동은 혼란스럽고 동요하기 쉽다. 일부 분리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를 지지했던 것, 상당수 페미니스트들이 박원순 사건에서 우파 변호사 김재련 씨와 제휴했던 것 등이 그런 사례다.
지난 대선 때 신지예 씨의 윤석열 캠프 참여도 계급과 좌우 구분을 무시하는 정체성 정치의 문제점을 잘 보여 줬다. 신지예 씨가 우파 정당으로 가서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이재명 캠프에 합류한 N번방 추적단 박지현 씨 사례도 근본에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런 계급 분단선 흐리기는 노동계급 대중이 차별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별을 낳는 사회 시스템을 수호하는 사람들을 아군으로 오인하게 만들기 때문인데,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환멸을 키우고 기층 운동을 성장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 문재인 정부하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국제적·역사적 경험을 보면, 정체성 정치에 기반한 운동의 중간계급 지도자들이 기성 체제에 편입되곤 했는데, 대다수 노동계급의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개선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해방 전략
그렇다면 차별에 맞서는 효과적인 전략은 무엇인가?
정체성 정치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교차성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교차성이란 한 개인에게도 성별, 섹슈얼리티, 민족, 계급, 장애 등 여러 차별이 교차한다는 개념이다.
교차성은 여성, 성소수자 등이 단일한 범주가 아님을 보여 주는 데 유용한 개념일 수는 있고, 연대를 강조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차별의 원인과 그에 맞서는 방법에 관해서는 말해 주는 바가 별로 없다.
좌파 일각에서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며 경제적 요구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요구는 중요하다. 차별받을수록 빈곤하기도 쉽다.
그러나 차별은 경제적 요구에 집중한다고 저절로 해소되지 않는다. 차별적 편견을 극복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이 차별에 맞선 해방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차별이 경제적 요구에 비해 부차적이라거나 노동계급이 투쟁을 벌이면 차별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계급 환원론’을 거부한다.
노동계급이 차별에 맞선 해방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차별이 인간 본성이 아니라 계급 사회와 자본주의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차별을 통해 노동계급을 이간질해 각개격파하려 한다. 그래서 차별은 노동계급 내의 특정 집단만 취약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를 약화시키고 착취 체제가 지속되는 데 기여한다.
차별받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노동계급이기도 하다. 그래서 계급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대중이 가장 광범하게 단결할 수 있는 공통 기반이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에게는 차별의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를 분쇄할 힘이 있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을 생산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를 멈출 특별한 잠재력이 있다. 착취는 차별과 달리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에 맞설 힘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계급이 단지 여러 차별받는 집단 중 하나일 뿐인 것은 아니다.
물론 노동계급이 미래에 발휘할 잠재력을 믿고 기다리자는 것은 아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차별을 매우 중요한 현실 투쟁 문제로 다뤘다.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그것이 어디에서 나타나든, 어떤 계층이나 계급의 사람들이 영향을 받든 모든 폭정과 차별의 징후에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누가? “노동조합 위원장이 아니라 인민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는 레닌의 유명한 말은 바로 혁명가들이 차별 반대의 최선두에 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야만 지배계급이 인종차별과 성차별과 성소수자 혐오를 이용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것에 맞설 수 있고, 그래야 체제에 맞설 만큼 크고 강력한 노동계급의 단결된 운동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날 노동계급이 차별에 맞선 투쟁에 자신의 막강한 힘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차별에 맞선 저항들이 있지만 노동계급 운동과 만나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차별 반대 운동 활동가들에게 노동계급에 기대라고 촉구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차별받는 사람들이 노동계급에게 희망을 발견할 만한 일이 생겨야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차별 반대 운동에 노동자들을 대거 동원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와 부문주의를 구현하는 그들은 차별 반대 선언이나 기자회견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소규모일지라도 혁명적 좌파가 중요하다. 우리는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며, 차별의 근원과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주장해야 하고, 차별에 맞선 정치를 노동계급 운동 내로 가져와야 한다.
우리는 기회가 있다면 일단의 노동자들이 차별에 맞서 자신의 특별한 힘을 사용하도록 만드는 활동을 해야 한다. 지난 2월에 울산의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울산 동구와 현대중공업에 온 난민을 환영하는 활동을 시작한 것은 좋은 사례다.
차별에 맞서는 방향으로 노동자들을 이끌려면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수적인 관념에 도전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즉, 차별에 실질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부문주의를 극복할 정치가 있어야 한다.
이런 정치를 가진 사람들이 혁명적 조직으로 결속해서 운동 속에서 운동의 단결을 위한 토론과 논쟁을 벌이면서, 차별에 맞선 운동과 착취에 맞선 운동을 연결시키려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