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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학생투쟁이 보여 준 잠재력과 약점

올해 상반기는 모처럼 대학생들의 투쟁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3~4월에는 고려대·경희대·이화여대·인하대·서강대 등 여러 대학에서 등록금 인상에 반대해 1천~3천 명이 참가하는 학생총회가 열렸고, 그중 몇몇 대학 투쟁의 경우 점거 농성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5월 말~6월 초에는 ‘반값 등록금’ 촛불 시위가 벌어졌다. 그 무렵 서울대에서는 법인화에 반대해 학생 수백 명이 28일간 본관을 점거하는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6월 반값 등록금 촛불 집회 학생운동 지도부의 개혁주의 정치가 투쟁의 성장을 방해하는 약점으로 작용했다.

올해 상반기 학생운동은 2008년 촛불항쟁과 세계경제 위기의 여파로 나타난 정치적 급진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2000년대 중후반에도 등록금 인상, 대학구조조정, 대학 당국의 학생운동 탄압 등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의 투쟁이 있었다. 그럼에도 진보적 학생들의 사기는 높지 않았다. 2000년대 중후반 노무현 정부의 위기 상황에서 그 정부와 진보가 동일시 되면서 겪었던 진보의 입지 약화 때문이었다.

2008년 촛불항쟁은 이런 분위기를 바꾼 전환점이었다. 물론 촛불항쟁은 동원 규모에 비해 가시적 성과물을 얻지 못했고, 당시 대학생들은 점거 농성, 동맹휴업 등 전투적 행동을 구사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촛불항쟁은 정치적 급진화라는 커다란 퇴적물을 남겼다. 촛불항쟁 당시 청소년이었던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대학가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2008년 가을부터 시작된 금융 위기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장하준 등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큰 호응을 얻은 것이 이를 보여 준다.

다른 한편, 경제 위기는 대중의 불만도 더 참기 어려운 수준으로 축적하고 있었다. 특히 지난해부터 나타난 물가 인상 압력 때문에 노동계급 가계가 앉은 자리에서 임금이 깎이는 효과를 경험하면서, 올해 상반기 투쟁은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투쟁과 학생들의 등록금 투쟁이 주된 형태로 등장했다.

상반기 투쟁들의 성과는 불균등했다. 각 대학 등록금 투쟁에서 경희대·인하대 등에서는 등록금 인상률을 낮추는 성과를 거둔 반면, 고려대·이화여대 등은 그러지 못했다. 서울대 학생들의 법인화 반대 점거 농성은 다른 국공립대학들의 법인화 추진 움직임에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서울대 법인화 중단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따라서 향후의 발전을 위해서는 오늘날 학생운동의 잠재력뿐 아니라 약점도 동시에 봐야 한다.

한대련 주류 계열의 민중전선 정치

올해 학생 투쟁들은 투쟁 초기부터 대체로 투쟁에 나선 학생들과 학생회 지도자들 사이에 긴장을 안고 있었다. ‘비운동권’ 총학생회들은 학생들과 대학 당국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학생들 편에서 투쟁을 조직하기보다, 대학 당국과 부적절하게 타협하곤 했다.

‘운동권’ 학생회들은 그나마 낫긴 했지만, 그들조차 대체로 선진적 학생들의 움직임에 뒤쳐져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의도치 않게 투쟁의 지도자로 내몰렸다. 올해 학생총회가 성사된 대부분의 학교에서 학생회 지도자들은 학생총회가 성사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하거나, 학생총회에서 점거 농성과 같은 전투적 행동이 결정되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한 경우가 흔했다.

그런데 ‘운동권’ 학생회 지도자들 중 일부는 전투적 행동을 주저하거나 심지어 반대했는데, 특히 한대련의 주류인 경기동부연합 경향이 제일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그들은 올해 초 등록금 문제에 대한 대응 방향으로 주로 등록금심의위원회 설치를 요구했고, 학자금취업후상환제(ICL) 개정 등 민주당과의 협력을 통한 각종 “법,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

이 활동가들은 ‘반값등록금’ 촛불 시위 때도 현 정권을 ‘1년 후 심판하자’는 내용의 배너를 들기도 했는데, 대체로 1년 후 대선과 총선에서 반(反)한나라당 후보들이 당선하는 것을 통해 등록금 문제 해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당면 학내 등록금 투쟁에서 투쟁 수위를 ‘지나치게’ 높일 필요가 없다고 여길 법했다.

실제로 이들은 학생총회를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일회성 집회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 당국들이 일회성 집회만으로 순순히 물러설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학생총회에 모인 동력을 점거 농성 같은 행동으로 연결시켜야 했다.

그러나 이화여대에서 한대련 활동가들이 이끄는 총학생회는 점거 농성을 반대했고, 고려대 총학생회도 비운동권 학생회들을 추수하며 점거 농성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데 핵심적 구실을 했다.

이는 한대련 주류 NL계열의 민중전선 정치에서 비롯한 개혁주의 때문이었다. 민주당과의 전략적 연합을 추구하는 민중전선 노선은 민주당에 무비판적이게 만들고 학생들의 투쟁을 민주당의 강령과 투쟁 전술 수위를 넘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효과를 냈다.

‘반값등록금’ 촛불시위가 동력을 더 유지하지 못했던 것도 이 노선과 관계 있다. 사실 한대련은 애초부터 이 투쟁을 6월 국회 입법 로비용으로 제한적으로 준비했다.

그래서 그들은 투쟁 확대를 위해서는 의제 확장이 필요하고 그를 통해 노동자들의 참가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다함께 등의 주장을 한사코 무시했다. 그리고 다른 단체들과 협력하지 않고 폐쇄적으로 집회를 조직하고 통제하려 했다.

학생회 운동

이런 약점은 학생운동을 학생회 운동으로 환원하는 기존 학생운동의 그릇된 전통 때문에 더 문제를 낳았다.

그동안 NL 경향은 학생회가 학생운동을 대표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학생회 공식 기구를 물신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학생총회와 같은 직접민주주의는 학생회 대의 기구에 비해 부차화했다.

예컨대 고려대 총학생회 중앙운영위(이하 중운위)가 점거 농성을 반대했지만 고려대 학생총회에서 학생들이 직접 그 결정을 뒤집고 점거 농성을 결정한 후에도, 고려대 총학생회는 비운동권 단과대 학생회장들의 의사를 중시해 점거 농성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을 중운위에 넘기는 식의 타협을 반복했다.

NL 경향만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 법인화 반대 투쟁을 지도하던 서울대 총학생회는 급진좌파인 학생행진 경향이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총학생회장단과 단과대 학생회장들의 회의체인 총운위는 비운동권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학생총회에서 압도 다수의 학생들이 지지해 점거 농성에 돌입했을 때 서울대 행진 경향 활동가들은 끈질기게 투쟁하려는 학생들을 대변했어야 했다. 이를 위해 열의 있는 학생들로 투쟁 지도부를 구성하고 점거 투쟁을 벌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학생행진 경향의 총학생회는 그런 방향을 채택하지 않고 학생회 활동가들 다수가 동의할 만한 수준으로 투쟁을 제한했다.

결국 점거를 해제할 때도 점거 농성에 참가하고 있는 학생들 다수는 점거 해제를 반대했지만, 총학생회는 학생회 대의 기구인 전학대회를 열어 점거 해제를 통과시켰다.

이런 경험에서 드러나는 것은 학생회가 자동으로 가장 전투적인 학생들의 의식과 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부터 1991년 5월 투쟁까지 학생들의 폭발적 투쟁이 지속될 때만해도 학생회는 명백히 투쟁 기구였다. 그러나 오늘날 학생회는 투쟁 기구의 성격도 일부 남아 있지만, 축제 등 학내 행사 조직 등을 신경 쓰는 복지 제공자의 성격도 동시에 강화됐다. 만약 학생회 집행부가 후자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다면, 학교 당국이나 기업 등에 맞선 투쟁을 이끌기보다는 그들에게서 복지를 제공받는 파트너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학생 좌파들은 학생운동을 학생회로 환원하지 말고, 학생회 안팎 모두에서 조직해야 한다.

전망

상반기 학생 투쟁의 동력은 사그라졌지만, 학생들의 투쟁은 여전히 잠재력이 있다.

첫째, 올해 학생 투쟁이 비록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커다란 패배로 끝난 것도 아니다. 비록 NL 계열의 민중전선 정치가 낳는 개혁주의·선거지상주의 분위기 때문에 대중이 다소 수동화돼 있긴 하지만, 급진화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더구나 경제 전망이 밝지 않아, 불만은 더욱더 증대할 것이다.

둘째, 민중전선 노선이 대중의 의식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중은 한나라당이 싫어서 민주당에 마지못해 투표할 수 있다. 따라서 대중의 투표 행위는 민주당에 대한 비판 의식을 함축한다. 그러나 NL 계열의 민중전선 정치는 민주당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를 뜻한다. 이런 간극은 상황에 따라 커질 수 있다.

셋째, 서구의 1968년 반란, 한국의 1987년 항쟁 등에서 보듯이, 학생들이 사회에서 겪는 소외 때문에 학생들의 투쟁은 갑작스레 분출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번 학생들의 투쟁도 올해 상반기처럼 쉽게 가라앉을 수 있다. 따라서 변혁가들의 의식적 노력이 중요하다.

사실 학생들의 폭발적 투쟁조차 그들이 자본주의에서 겪는 소외를 부분적으로 완화시킬 수는 있어도 소외의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폭발적으로 투쟁에 나섰다가도 그들 자신의 힘에 한계를 느끼면서, 금세 투쟁에서 이탈하곤 한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오로지 이윤 생산을 마비시킬 수 있는 사회세력이 투쟁에 나설 때만 가능하다. 즉, 학생 투쟁이 노동계급 투쟁을 촉발해, 노동계급이 다른 피억압 집단과 함께 혁명적으로 분출할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학생들의 투쟁도 전체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NL 계열의 민중전선 노선에서 비롯한 개혁주의에 대항하는 변혁적 사상과 전략·전술을 제시할 수 있고, 학생 부문의 시야가 아니라 전체 사회 변혁이라는 관점에서 투쟁에 나서도록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이 중요하다. 그런 지도력을 건설하는 데에서 변혁 정치 조직이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변혁 정치 조직 건설로 전투적 학생 활동가들의 과제를 환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급진화가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봐야 한다. 대중은 급진화하면서도 개혁주의의 영향력 때문에 수동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변혁 정치 조직 건설과 진보적 학생들과 공동전선적 방식으로 운동 건설하기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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