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기업:
투쟁의 쓰라린 교훈
〈노동자 연대〉 구독
유성기업 노조 지도부가 법원 중재를 수용하면서 투쟁이 아쉬운 마무리로 향하고 있다. 노조는 ‘불법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기로 했고, 징계와 구속 등에 대한 해결 없이 복귀하기로 했다. 애초 요구였던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은 사라져 버렸다.
언론들은 “노사 양쪽이 한발 양보하니 문제가 해결”됐다지만, 우리 편의 양보가 더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것은 불가피한 게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로 세상을 놀라게 했을 때만 해도 우리 쪽에 승산이 있었다.
당시 현대차의 일부 특근이 중단됐고 기아차에선 6천 대가 넘는 생산 차질이 빚어졌다. 정부와 재계는 이 투쟁이 노동계 전반으로 확대될까 봐 걱정했다. 유성기업 투쟁은 심야노동의 끔찍함을 세상에 알렸고, 계급 양극화에 불만을 느끼던 이들에게 초점을 제공했다.
점거파업
이에 놀란 이명박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짓밟고 공장 밖으로 끌어냈다. 투쟁의 뇌관을 제거하는 게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쪽에서도 바로 그 뇌관, 공장 점거를 유지하면서 연대를 확대하는 게 사활적으로 중요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노조 지도부는 공장 사수를 택하지 않았다. 이것은 90일 넘게 지속된 투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였고, 이미 이 때부터 기세는 꺾였다. 물론 제대로 엄호에 나서지 않은 민주노총·금속노조 지도부에도 책임이 있다.
유성기업지회 지도부는 사실 처음부터 자기 제한적이었다. 점거파업도 직장폐쇄에 떠밀려 의도치 않게 시작됐다. 사측은 매우 치밀하고 단호하게 공격을 준비했지만, 지난 10여 년간 핵심 부품사라는 유리한 조건에서 잔업거부와 시한부 파업 정도로 교섭을 타결해 오면서 근육이 무뎌진 노조는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것이다. 예컨대, 노조 지도부는 복지동 건물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생산 라인 점거를 조직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쌍용차 트라우마’와 법적 처벌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점거파업을 의식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경제 위기 시기에는 점거파업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데 말이다.
노동자들이 공장 밖으로 쫓겨난 뒤부터는 연대가 중요했지만, 이것도 잘 조직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민주노총·금속노조 지도부가 투쟁 건설을 회피한 것이 문제였다. 금속노조 지도부는 연대 투쟁 대신 양보를 통한 타협을 추구했다. 연대 파업 선언도 말 뿐이었다. 현대·기아차 지부도 연대는커녕, 자기 작업장 문제로 투쟁해 힘을 보태지도 못했다.
민주당은 이런 틈을 이용해 중재를 자처하고 나섰다. ‘야권연대’에 종속된 민주노총·금속노조 지도부도 민주당을 추수했다. 그러나 민주당 충남도지사 안희정은 ‘기업주도 직장폐쇄의 권리가 있다’는 말이나 했다.
민주당 의존은 연대 투쟁을 어렵게 만든 중요한 고리였으므로, 이에 대한 비판과 단결 투쟁 호소는 중요했다. 그러나 유성기업의 좌파 노조 지도자들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투쟁에 뾰족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민주당에 대한 기대에 타협했고, 정동영이 노동자들에게 양보 압력을 넣을 때도 침묵했던 것이다.
사노위·노동전선 등은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연대를 건설했지만, 이런 약점들을 분명히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데서는 부족했다. 다소 뒤늦게 이 투쟁에 뛰어든 다함께도 이 점에서는 반성적으로 돌아볼 점이 있다.
유성기업 투쟁은 정치적 분석과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줬다. 투쟁의 힘을 극대화할 전술, 연대를 확대할 요구와 대안, 계급연합이 아니라 노동자 단결의 중요성이 바로 그것이다. 활동가들과 유성의 투사들도 이런 쓰디쓴 교훈을 곱씹으며 다음 기회를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