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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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맑시즘 2011(주최 다함께) 마지막 날인 7월 24일에 강연한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의미’를 녹취한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석학이자 활동가로서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교수이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이번 방한에서 이 외에도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 ‘아랍 혁명의 현황과 전망’ 등 다양한 주제로 연설했다. 이 중 일부를 앞으로 지면에 실을 예정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여러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 첫째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내재한 모순들에 관한 이론이다. 이 점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처음 제시했고 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발전시킨 자본주의 위기 이론은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 방식에 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 준다.
마르크스주의 위기 이론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경제 위기는 정치인들의 어리석은 실책이나 자본가들의 지나친 탐욕 때문에 빚어지는 사고 따위가 아니다(물론 어리석은 정치인들과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은 도처에 널려 있지만). 오히려 위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적 속성에서 비롯한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유기적 위기’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이 유기적 위기라는 것은 자본주의 역사 내내 수 년마다 한 번씩 찾아왔던 평범한 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이 극에 달한 탓에 그러한 모순을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해결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지는 위기를 말한다. 그래서 유기적 위기는 특히나 뿌리가 깊고 또 오래 지속된다.
오늘날 우리도 그러한 유기적 위기를 겪고 있다. 미국의 자유주의 좌파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현재 위기를 ‘제3의 대공황’이라고도 했다. 즉, 그는 현재의 위기를 19세기 말의 대공황과 그보다 더 심각했던 1930년대의 대공황에 비교하는 것이다.
참고로 그람시가 유기적 위기 개념을 개발한 것은 바로 30년대 대공황의 맥락 속에서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의미를 모색하는 시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람시의 사상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더욱 시의적절하다.
유기적 위기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자면, 어떤 사람들은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경제의 높은 성장률을 거론하며 이번 위기가 사실상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기적 위기를 포함한 모든 경제 위기는 언제나 불균등하다. 1930년대에도 일본을 비롯한 몇몇 ‘주변부’ 경제들의 성장률은 상당히 높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체제의 한 부분이 상대적으로 호경기를 누리고는 있지만 세계경제에서 여전히 가장 중요한 두 축인 북미와 유럽 경제가 위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게다가 중국의 호황이 얼마나 지속가능한지도 커다란 의문이다.
유기적 위기
그럼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둘째 의미로 넘어가 보자. 마르크스주의는 정치 이론으로서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 이 말이 놀랍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 환원론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 위기는 잘 설명해 줄 수 있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해 줄 말이 없다”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정치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그람시 등 최상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당대의 핵심 정치 쟁점들을 분석하고 거기에 개입하려 해 왔다.
마르크스는 토대와 상부구조를 구분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토대는 한 사회의 기초가 되는 경제에 해당하고 상부구조는 그 토대 위에 자라나는 정치, 법률 등의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토대-상부구조론을 근거로 마르크스가 상부구조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마르크스는 상부구조가 사람들이 계급 갈등에 눈뜨게 되고 계급 투쟁을 벌이게 되는 정치적·법률적·이데올로기적 장이라고도 말했다. 달리 말하면, 경제 위기를 낳는 구조적 모순은 생산의 영역에서 발생하지만 그러한 모순의 해결은 무엇보다 정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람시도 표현만 바꿔서 같은 말을 한다. 그는 유기적 위기가 발생하면 서로 다른 사회 세력들이 위기에 대해 저마다의 해결책을 관철시키려고 서로 투쟁하는 정치 지형이 조성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 끝에 결국 어느 사회 세력의 해결책이 관철될지는 전혀 결정돼 있지 않다. 그람시가 살던 이탈리아의 경우 결국 파시스트들이 승리했고 그람시 자신도 투옥됐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경제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둘러싸고 여러 사회 세력들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지배계급이 공세를 벌이고 있다. 지배계급의 공세는 유럽에서 가장 앞서 있지만 미국 등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공세의 본질은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한층 더 강화하려는 데 있다. 애초에 신자유주의가 이번 위기를 촉발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미친 짓이지만, 어쨌든 지배자들은 이를 강행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공세가 유럽의 긴축 반대 투쟁, 아랍 혁명 등 다양한 형태의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이다.
토대와 상부구조
이 점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세 번째 의미와 연결된다. 계급 투쟁의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점에서는 임금노동과 자본의 적대 관계가 현대 사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야말로 자본주의가 직접 생산자들로부터 잉여 노동을 강탈해 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적대 관계가 항상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에서의 계급 적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이되고 은폐된다. 아이러니이게도 때로는 자본가들이 오히려 이러한 적대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의식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신자유주의라는 것도 자본가들이 매우 의식적으로 수행한 계급투쟁의 일종이었다.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율을 높이고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한 계급투쟁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급진 좌파의 상당수는 이러한 계급 갈등의 중요성을 자본가들만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이들은 사회 세력으로서 노동계급이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비공식 노동이 등장함에 따라 노동계급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율주의 사상가인 하트와 네그리는 혁명적 주체로서 노동계급은 경계가 훨씬 더 모호한 세력인 ‘다중’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첫째 반론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노동 형태의 변화들은 사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임금노동이 현대 산업 자본주의의 필수불가결한 기초임을 상세한 분석을 통해 보여 줄 뿐 아니라, 19세기 영국에서는 안정적인 형태의 임금노동과 더불어 대량 실업이, 그리고 훨씬 더 불안정하고 비공식적인 다른 형태의 노동이 공존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는 21세기의 자본주의도 19세기의 자본주의와 닮았으며 19세기의 자본주의로 회귀한 듯한 면도 있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이처럼 안정적인 임금노동과 불안정 노동이 공존했음에도 매우 투쟁적인 노동자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한 운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안정적인 임금 노동자들이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그들의 처지를 자신들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영국의 항만 노동자들이 정확히 그러한 사례다. 19세기에 영국 항만 노동자들은 전형적인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이었지만 20세기에는 전형적인 조직 노동자들로 변모했다.
그런데 이 같은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안정된 일자리를 가진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 사이에 이해관계 갈등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네그리는 잘 조직된 공장 노동자들을 ‘쿨락’에 비유하기도 했다. 쿨락은 혁명 전 러시아의 보수적이고 부유한 농가를 일컫는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따르자면 노조에 조직돼 있고 고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는 다른 노동자들이 무노조·저임금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이익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저임금을 받는 미조직 계약직 노동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측으로서는 잘 조직된 고임금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공격하기가 쉬워진다. 기업주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노동시장 유연화’를 말할 때 그들의 의도는 모든 노동자들을 불안정·비공식 노동자들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에 맞서 노동계급 전체의 처지를 향상시키는 것, 즉 가능한 모든 노동자들을 노조에 가입시키고 임금과 고용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조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계급 전체에 이롭다.
다른 한편으로, 임금 노동자들이 어째서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그토록 중요한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은 착취 당한다. 이렇게 말하면 노동자들의 처지가 끔찍해 보이며, 실제로도 끔찍하다. 그러나 착취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착취 당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착취 당한다는 것은 곧 자본가를 위해 이윤을 창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의존해야만 하며, 따라서 노동자들은 집단적으로 행동할 경우 자본가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반면 이러한 착취 관계의 바깥에 놓인 사람들, 예컨대 실업자나 협동조합원 또는 비공식 부문 종사자 등은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지만 착취 받는 노동자들에 비하면 훨씬 힘이 약하다.
물론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 같은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영국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1980년대에 겪었던 패배의 기억에 짓눌려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한국 사람들이 “노동계급은 끝났다”는 등의 얘기를 할 때면 솔직히 웃음이 나온다.
한국 노동계급이 군사 독재를 무너뜨린 것이 고작 25년도 안 됐다. 나는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우리도 군사 독재를 무너뜨려 본 적은 없다. 이렇듯 노동계급이 일시적으로 약해지고 사기저하 된다고 해서 노동계급의 고유한 힘이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와 관련한 마지막 쟁점은 “그렇다면 조직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면 불안정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나는 런던에 있는 대학에서 일하는데, 런던의 대학 청소 노동자들은 불안정 노동의 고전적 사례다. 임금 수준이 극히 낮고, 정식으로 고용되지도 않으며, 많은 경우 불법 이민자들이기 때문에 청소 노동자들은 종종 가장 악랄한 방식으로 착취를 당한다.
그런데 최근에 한 노조가 대학 청소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일부 대학에서 성공을 거뒀는데, 이는 무엇보다 미화원들 자신의 용기와 자기 조직화 덕분이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성공 요인은 교수·강사와 교직원들이 포함된 대학 노조의 지원이었다.
이집트에서는 이와 같은 연대와 단결이 훨씬 더 높은 수준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집트는 실업률이 끔찍하리만치 높고,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비공식 부문에 속해 있다. 비교적 부유한 지역인 카이로 중심가를 가 봐도 길가에 그냥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비공식 부문의 일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누군가가 일감을 줄 것이라는 기대 하나만 가지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집트 혁명 과정에서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파업 운동을 이끌어 왔던 조직 노동자들과 엄청난 수의 조직되지 않은 도시 빈민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목격했다. 남한이나 영국보다 비공식 부문이 비할 데 없이 큰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조직 노동자와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 사이에 이해관계 대립이 있다는 주장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다.
노동자 계급
이집트 혁명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마지막 의미와도 연결된다. 달리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에 관한 이론과 실천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고 규정했다. 즉,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그들을 대신해 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 그저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 혁명만 해도 마치 기적처럼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결정적 계기가 된 1월 24일의 첫 시위는 자유주의자, 좌파 민족주의자, 혁명적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정치적 배경의 활동가들이 공동으로 제안해서 열렸다.
달리 말해, 이집트 혁명을 처음 촉발시킨 것은 활동가들의 의식적 개입이었다. 물론 혁명에 진정한 힘을 불어넣었던 대중의 폭발적 호응은 단지 활동가들이 허공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그람시의 설명과 일치하는 현상이다. 그람시는 혁명이라는 것이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과 이를 조직화하려는 중심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은 순수하게 자발적인 과정이 아니다. 거기에는 정치적 조직이 필요하다.
이집트에서는 조직된 정치 세력이 혁명의 도화선 구실을 하기는 했지만, 정치적 조직화가 필요한 것이 꼭 그것 때문은 아니다. 보통은 훨씬 덜 조직된 집단들이 혁명의 불씨가 된다. 정치 조직이 필요한 진정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체계적으로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집단적 주체가 되는 것을 온갖 경제적·문화적·이데올로기적 방식으로 방해한다. 노동자들이 승리하려면 노동자 투쟁도 중앙집중화 돼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의 형태로 중앙집중화 돼 있는 자본가 권력에 대등하게 맞설 수 있다. 그래서 정치적 조직이 필요하다.
죄르지 루카치는 “조직은 이론과 실천을 연결시킨다” 라는 매우 중요한 말을 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첫째, 실천과 연결되지 않는 이론은 맹목적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론이 아무리 그럴싸하더라도 그것이 실천에서 입증되지 않으면 그 이론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론 없는 실천도 맹목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이것저것 시도하기만 하면서 각각의 시도에서 얻은 교훈을 이론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면 결코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 조직은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엮어 준다. 정치 조직은 이론을 개발하고 실천에 적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실천에서 얼마나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느냐에 따라 이론을 수정하기도 한다.
혁명적 정치 조직에서 민주적 토론과 의사결정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혁명 조직은 그저 지도자 한 명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집단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사실 혁명적 조직에서는 최상의 이론을 개발하기 위해서도, 또 그 이론을 실천에 적용해 본 결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도 민주적 토론과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조직에 가입하면 자신의 개성이 사라질 것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경험에 비춰 보자면, 내가 살면서 만난 가장 괴짜스러운 사람들 중 상당수는 혁명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즉,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혁명 조직이 사람의 개성을 억누른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어떤 집단에 소속되는 것은 개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힘을 확장시켜 준다. 자본주의에 혼자의 힘으로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집에서 TV와 인터넷으로만 세상 소식을 접하다 보면 완전히 의기소침해질 수 있다.
노르웨이에서 어느 파시스트 광신도가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등의 암울한 소식을 접할 때면 세상은 이토록 끔찍한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감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혁명 조직에 가입해서 파시즘을 박살내려는 운동을 건설하고 노르웨이 학살범 같은 쓰레기들을 박멸하는 데 동참하는 방법도 있다. 나라면 이 방법을 택하겠다.
결론 짓자면, 우리는 엄청난 과업을 제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가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위기에 빠진 가운데 혁명이 부활하고 있다. 문제는 이 역사적인 시기에 당신은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단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겠는가, 아니면 세상을 바꾸기 위한 투쟁에 동참하겠는가. 만약 후자를 택한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리 발언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유무역에 대해 좋게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1840년대에 마르크스가 자유무역을 찬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은 우리가 마르크스의 말을 종교적 교리처럼 취급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해 준다.
오늘날 자유무역협정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약소국 경제를 개방시켜 그 나라 노동자들을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려는 수단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자유무역이 번영을 가져다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무역 개방이 이루어진 1980년대 이후 세계경제 성장률은 그 전 시기보다 훨씬 낮아졌다.
위키리크스가 튀니지 혁명을 촉발했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튀니지 혁명이 시작된 것은 모하메드 부아지지라는 청년이 자신의 노점 판매대를 경찰이 압수한 것에 항의해서 분신했을 때였다.
이 사건이 촉발한 분노 때문에 시위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확산됐고 급기야 튀니지 수도인 튀니스로 번졌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벤 알리 정권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노동자들의 총파업이었다.
그래서 튀니지의 사례는 부아지지 같은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과 조직 노동자들의 상호의존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미 제국주의가 위키리크스 창립자를 매장시키려 하는 데 대해 일정한 한계 내에서(그가 성범죄 의혹에도 연루돼 있으므로) 그를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이 그 자체로서 기존의 권력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환상(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신화인)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대중투쟁과 조직화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위키리크스
영국에서는 6월 말에 공공부문 노동자 80만 명이 참가한 거대한 파업이 있었다. 그리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영국 노조 지도자들에게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총파업 일정을 잡으라고 압력을 넣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6월 말 파업에 동참했던 노조들은 주로 SWP가 비교적 강력한 기반을 갖춘 곳들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는 비교적 작은 세력이다.
우리가 시도해 온 것은 노조 지도자들이 싸움에 나서야 한다는 현장 조합원들의 압력을, 좀 더 좌파적인 노조 지도자들과의 공동전선과 결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혁명가들은 소수기 때문에 대중 행동을 조직하려면 흔히 대단히 관료적인 노조 지도자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노조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넣고 필요한 경우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려면 독립적인 혁명가 조직과 현장조합원 조직이 필요하다.
혁명 조직이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상명하달식 관료제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질문한 사람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중앙집중적인 동시에 민주적인 혁명 조직을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몇 년 전에 SWP도 지도부가 나머지 당원들과 거리가 멀어진 탓에 한 차례 위기를 겪었다. 이러한 당 내 문제를 바로잡는 데는 상당한 투쟁이 필요했다. 결국 문제가 해결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중앙집중제와 민주주의 중 한 축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전략과 전술
마지막으로 전략과 전술에 대해 말하자면, 전술은 투쟁의 특정 국면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특정 방법이다. 전략은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을 향한 투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상호 연결된 모든 전술들의 체계를 말한다.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어떤 전술이 적절한지를 책에서 배울 수는 없다는 최일붕 동지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지난 10여 년 사이 SWP는 여러 차례 복잡한 전술적 전환을 해야 했다. 21세기 초에는 새로 탄생한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선회했고, 이후 전례 없는 규모의 반전 운동을 주도했다.
그 다음으로는 이 반전 운동을 기반으로 등장한 급진 좌파 선거 연합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반전 운동과 선거 연합이 모두 붕괴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 뒤로 우리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선 저항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처럼 복잡하고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할지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었을까? 레닌이나 트로츠키 또는 토니 클리프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고인이 돼 있었고, 그들의 저작은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실수도 많았다. 살아 움직이는 혁명 조직은 항상 투쟁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 오직 소규모 종파들만이 실수를 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 조직이 올바른 혁명적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려면 조직원 전체의 창의적 노력이 필요하다.
토니 클리프는 “혁명 정당에는 평당원이 없다. 모든 당원이 지도자다”라는 레닌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솔직히 나는 레닌의 책 어디에서도 이 인용문을 찾지 못했다. 클리프가 꾸며 낸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어쨌든 좋은 말이긴 하다.
달리 말하면, 혁명 조직의 모든 구성원은 저마다 투쟁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 조직이 나아갈 길을 결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혁명가가 되기에 지금처럼 가슴 뛰는 시기가 언제 또 있겠는가! 엄청난 위기와 더불어 감동적인 투쟁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말이다.
아직 다함께 회원이 아닌 분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이번 위기에 맞선 인류의 저항을 승리로 이끄는 데 동참하고 싶은가?
만약 그렇다면 다함께만큼 당신이 있기에 좋은 자리가 없다. 혁명 조직에 가입해서 트로츠키가 말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세상”을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