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농민공의 고달픈 처지와 막강한 잠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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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 동안의 ‘경제 기적’ 덕분에 중국은 세계적인 공산품 수출국이 됐다. 그러나 그 뒤에는 농민공(농촌에서 도시로 온 이주노동자) 수억 명의 고통이 있다.
불과 2년 전까지도 중국의 성장은 주로 서방, 특히 미국에 소비재를 수출한 덕분이었다.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대다수 컴퓨터, 핸드폰, 복사기, 신발과 의류는 중국에서 만들어진다.
중국의 이런 엄청난 성장은 농민공들이 끊임없이 도시로 유입된 덕분에 가능했다.
그들은 끔찍한 노동조건 아래 매주 6∼7일 동안 매일 14시간씩 일한다. 사장들은 툭하면 일하는 시간 동안 작업장의 화재 비상통로로 향하는 문을 잠근다. 관리자들은 툭하면 노동자들을 구타한다.
2003년 정부 조사를 보면, 농민공 가운에 75퍼센트가 임금 체불을 경험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계속 도시로 몰려들었다. 농촌보다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일자리를 수시로 옮겼다. 그들은 또한 노동중재법정이 보장하는 새로운 권리를 이용해 밀린 임금을 받아내려 애썼다.
그들은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1994∼1995년 동안 농민공의 거의 30퍼센트가 일하는 광동성에서 파업이 7백 건이나 벌어졌다.
이런 파업들은 종종 이 공장에서 다른 공장으로 확산됐다.
이런 투쟁들 중 상당수는 요구 조건 중 일부를 따내면서 성공했다. 그럼에도, 이런 투쟁들은 주로 대다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에 관심이 없는 고용주의 만행에 항의하는 방어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우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농민공들은 보통 설날을 전후해 2주 동안 고향을 방문하며 이때 대다수 공장들은 잠시 문을 닫는다.
2006년 초, 광동성 정부는 고향에 간 노동자들 중 2백만 명이 일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농민공들이 임금이 높은 다른 지역으로 갔기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인구 집단의 변동 때문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 중국 정부는 ‘한 자녀 정책’을 도입했다. 이것은 청년의 수를 대폭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중국에서 농민공이 한창 일할 나이인 19∼22세 사이 청년의 수는 약 1억 명이다. 2020년에 이르면, 이 수는 5천만 명으로 뚝 떨어질 것이다.
2008년 경제 위기 때문에 중국 전역에서 2천만 개에서 2천5백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러나 2009년에 사용자들은 일손 부족을 다시 호소하기 시작했고, 각 성 정부들은 최저임금을 올려야 했다.
2010년 여름 일부 농민공들은 자신이 새로운 힘을 가지게 됐음을 보여 줬다. 자동차 공장들에서 공격적이고 잘 조직된 파업이 벌어졌고 다른 공장으로 비슷한 움직임이 확산됐다.
그들은 파업 피켓팅을 벌였고 구체적 요구를 제시하고 기층에 기반을 둔 파업 위원회를 결성했다. 비록 일부 파업 지도자는 해고됐지만 이 투쟁들은 대부분 대폭적 임금인상을 따냈다.
그러나 아이폰과 다른 애플 제품을 만드는 폭스콘의 대형 공장에서 벌어진 일련의 자살 사건은 농민공 삶의 다른 측면을 보여 줬다.
불과 1년 사이 청년 노동자 10여 명이 강제 초과 노동, 노동권 유린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농민공들은 광동성 인구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지만 거주권이 없다. 그들은 주로 회사가 제공한 곳에서 살아야 한다.
이런 상황은 엄청난 휘발성을 가지고 있다. 농민공들은 자신의 힘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 부모들은 참았던 노동조건을 더는 참으려 하지 않는다.
개별 고용주와 지역 정부는 이 분노를 잠재우려고 임금을 올렸다. 그러나 한 서방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 임금인상은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고용주와 관료 들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겁을 먹었다.”
중국에서는 아직 그 정도 수준의 투쟁이 폭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발생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은 이미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