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위기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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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유럽정상회담에서 영국을 제외한 26개국이 신재정협약을 추진키로 합의했다. 또 IMF를 통해 재정위기에 처한 국가들에게 2천억 유로를 지원하고, 유럽안정화기구(ESM)를 예정보다 1년 앞당겨 내년 7월에 도입키로 했다.
그러나 이른바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당장 무디스나 S&P(스탠다드앤푸어스) 같은 신용평가사들은 이번 협의가 ‘유로존 위기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며 유로존 국가들에 대한 신용등급 강등을 예고했다.
사실 이번 합의는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기는커녕, “유로존 채권 발행 계획이나 구제기금, 유럽중앙은행의 지원도 없[는]”(〈파이낸셜타임스〉)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그리스의 디폴트, 이탈리아의 구제금융 신청, 프랑스 대형 은행의 파산 등 유로존의 본격 위기를 부를 시한폭탄은 여전히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른다.
유로존은 단일 화폐로는 가장 큰 시장이므로 위기가 세계경제에 미칠 영향은 엄청날 것이다.
한국 경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기획재정부 장관 박재완도 “유로존 위기에 따른 추경예산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의 주요 수출 산업인 조선업의 경우, 유로존 위기 심화로 대우해양조선에 발주한 6천억 원짜리 계약이 취소되고 STX조선이 발주한 1조 5천억 원짜리 선박 제작이 연기되면서, 한 달 사이 대출 연체금이 세 곱 넘게 늘었다.
시한폭탄
이미 그리스는 사실상 국가부도 상태다. 그리스는 부채상환 시기가 닥칠 때마다 더 극심한 내핍과 민영화를 약속하며 유럽통화연맹·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에 의존해 빚을 갚고 있다. 이것은 결코 지속가능한 방식이 아니다.
그리스의 10년물 국채 금리는 연 29퍼센트로 거의 사채 이자 수준이다. 채권이 부도날 경우, 이를 보상해 주는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가산금리)이 90퍼센트가 넘는다. 즉, 투자자들은 그리스 디폴트의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이라고 보고 있다.
이탈리아 국채의 경우, 2008년 위기 전 하루 거래량이 59억 유로였지만 현재는 9억 유로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조지 소로스는 “‘본드런’(채권시장 탈출)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1930년대 초, 미국 대공황을 심화시킨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처럼 이탈리아·스페인 국채에 대한 투매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이탈리아에 가장 많은 대출이 물려 있는 프랑스 은행들의 유동성 문제는 특히 심각하다. 다급해진 프랑스 사르코지 정부는 2012년에만 70억 유로에 달하는 재정 긴축안을 발표하며 파장을 수습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무디스는 프랑스 최대 은행 등의 신용등급을 강등했다.
이미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포르투갈·아일랜드, 청년 실업률이 40퍼센트가 넘는 스페인도 언제 위기가 폭발할지 모른다.
심지어 독일의 10년물 장기국채도 인기가 없다. 독일도 장기적으로는 유로존 위기의 도미노에서 안전하지 않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로존 위기의 원인에 대한 진단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PIIGS 국가부도 위기의 교훈〉 보고서에서 “무분별한 복지 지출과 같은 정부지출 축소, 정규직에 대한 과도한 고용보호를 폐지” 등이 유럽 경제 위기의 시사점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보수 언론들과 1퍼센트 지배자들이 거듭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경총 회장 이희범은 ‘과잉 복지가 글로벌 경제 위기를 불렀다’고 했고, 〈중앙일보〉는 “유럽 재정위기를 보면서 한국이 복지 투쟁에 골몰한다면 그야말로 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과잉복지가 문제?
그러나 이런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어처구니없는 얘기일 뿐이다.
지금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남부 유럽국가들의 복지 수준은 스웨덴·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에 비교해 더 낮다. 그리스의 임금과 연금 수준은 유럽 최하위다.
더구나 현재 상황에서 복지 축소와 긴축 정책은 위기를 더 심화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더 강력한 긴축안을 도입할수록 더 불안정이 심해지는 그리스가 그것을 보여 준다.
한편, 장하준 교수는 ‘금융과 부동산 중심의 경제모델’이 진정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금융·부동산 중심의 경제들이 몰락한 데 견줘 독일·스웨덴 등 제조업 중심 국가들이 경제도 빨리 회복되고 재정적자도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독일 등 유로존 내 ‘핵심’국 정부와 자본이 자국 노동자들의 희생과 다른 ‘주변’ 국가들의 적자를 바탕으로 이윤을 보장받아 왔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영국 SOAS대학의 라파비차스 교수는 유로화 도입 이후 ‘핵심’지역, 특히 독일은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억제하며 ‘경쟁력’을 키워 왔다고 분석했다. 이런 ‘경쟁력’의 차이와 이에 따른 경상수지 불균형이 결국 부메랑이 돼 재정위기를 심화시킨 것이다.
그리스는 자국 통화를 버리고 유로화를 채택했고, 세계 최강 경제 중 하나인 독일 경제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호황은 끝났고, 유럽 주요국 지배자들은 더 강력한 내핍 강요로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로’라는 족쇄에 갇혀 긴축 외에 다른 정책을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라파비차스 교수는 이제 진정한 논점은 디폴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디폴트를 할 것인가’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본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다수 대중의 이익을 위해, 부채의 ‘질서 있는’ 청산이 아니라 무조건적 청산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유로화를 탈퇴하고 은행 국유화와 자본 통제를 실시하며 급진적 재분배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유로존 국가들은 ‘유로 족쇄’에 묶여 있다. 협력은커녕 이른바 ‘이웃 궁핍화 정책’이라는 경쟁과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독일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남유럽을 희생시키는 유로존 긴축 정책을 주도하고 있고, 영국은 독일과 프랑스 주도의 신재정연합 건설 제안을 거절해 유럽연합 자체의 위기를 부르고 있다.
이탈리아·그리스 총리 퇴진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 지배자들의 경제적·정치적 무능력은 확실해지고 있다.
끔찍한 경제 위기를 낳은 자본주의 체제는 유럽에서 또다시 경제·정치·사회적 위기를 격화시키고 있다.
2008년 경제 위기 충격 이후 잠시 숨을 고르던 유럽의 청년들과 노동자들, 99퍼센트의 대중은 자본의 탐욕과 경제 위기에 대한 일방적인 희생에 반대하며, 파업과 광장 점거운동으로 나서고 있다. 유럽의 운명은 이런 투쟁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