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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독자편지 최태준 씨의 독자편지를 보고:
지적 탐구와 대안 제시는 투쟁 확대와 대립되지 않을 것이다

약 한 달 전, 최태준 씨가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의 의의와 좌파의 역할에 관한 독자편지를 기고했다.

최태준씨는 박원순의 당선으로 진보 운동에 기회가 열린 상황에서 “우익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예리한 비판”을 하고, “시민사회 내부로 깊숙이 진입”해서 “넓은 범위의 연대와 참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자본의 논리에 맞서 좌파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큰 틀에서 이는 올바른 정세판단이고 방향 제시다. “박원순이 당선 된다고 해서 바뀔 것은 별로 없다”거나(사노위), 박원순이 벌인 재벌개혁 운동이 “초국적자본(과) 공통의 이해관계와 지향을 가지고 있다”(사회진보연대)거나 “한국경제를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경제시스템으로 개조하는 운동”(공공현장연대회의)이었다고 일축하는 일부 좌파들보다는 현실을 몇 배는 더 정확히 묘사한 것이다.

박원순을 사실상 신자유주의 세력과 같다고 매도하는 이런 진단은 “등록금 철폐 투쟁을 하라”고 학생운동에 지지를 보내고, 공공부문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추진하며 노동운동에 힘을 실어준 박원순의 행보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 박원순의 당선이 한미FTA 반대 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고무한 사실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최태준 씨와 논쟁하고 싶은 쟁점들도 있다. 시민사회 내부로 깊숙이 진입하기 위해 ‘투쟁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과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지적으로 깊이 탐구”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다.

최태준씨의 두 주장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투쟁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좌파가 투쟁을 확대하려고 들면 ‘소통’하지 못한 채 연대의 폭이 좁아지고 운동이 고립될지 모른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듯하다. 투쟁이 고립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까닭은 극우들에 의해 형성된 ‘인식의 카르텔’ 또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먼저 깨기 위한 지적 탐구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오히려 투쟁을 건설했을 때 사람들의 의식이 발전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후퇴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박원순 당선 직후 분출한 한미FTA 반대 운동을 예로 들자면, 처음에는 “FTA 재협상” 수준으로 제기 됐지만 집회를 반복하면서 “FTA 폐기”로 수위를 높였고, 한나라당의 날치기 통과 이후에는 “명박 퇴진”으로 확대 및 발전해 왔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과 국민참여당과 같은 한미FTA 원조 세력조차도 “그 땐 정말 몰랐다”(정동영, 유시민)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매번 투쟁의 꽁무니를 쫓아 왔다.

FTA반대 운동을 더 길게 보면, 2006년에는 한미FTA가 주로 농민들만의 문제로 여겨졌지만, 투쟁을 거치면서 양국 간 불평등 협정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영리병원을 운영하는 1 퍼센트를 살 찌우기 위해 건강보험에 기대어 사는 99 퍼센트를 팔아 넘기려 한다는 계급적 분석도 등장하면서 연대가 더 확대됐다.

놀라운 발전

이는 한미FTA 반대 운동만의 유별난 특징이 결코 아니다. 이집트에서도 민중들이 처음에는 제한적 정치 자유와 약간의 최저임금 인상만을 요구했지만, 무바라크를 퇴진시켰고 지금은 한 때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군부에 맞서 더 큰 투쟁을 벌이는 놀라운 발전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런 과정은 자동적이지 않았다. 이집트 좌파 활동가들이 투쟁을 더 확대해야만 그동안 얻어낸 성과를 지킬 수 있다고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강조하고 다녔고, 그런 노력이 투쟁을 진전시키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올해 초 청소노동자 투쟁, 2008년 촛불항쟁,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도 모두 비슷했다.

지배계급 이데올로기가 건재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FTA를 반대하는 주장들은 분명 FTA반대 운동의 명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무기들이지만, 그렇다고 조중동의 영향력이나 정부의 FTA 광고를 압도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하다. 선전 수단만 놓고 보면 우리는 베트남전 당시 미군에 맞서 싸운 베트콩만큼이나 열세였다.

이집트에서는 심지어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튀니지와 달리 무바라크는 퇴진시키기 어려울 것”, “무바라크와 달리 군부는 이집트인들의 신뢰를 받아서 큰 영향 없을 것”이라면서 계속 헛발질만 해댔지만 대중들은 계속 전진했고 지금도 전진하고 있다.

결국 지배 이데올로기에 결정적 균열을 가한 것은 대중 자신의 행동이었다. 사람들은 지배계급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도 하지만, 자신이 투쟁에 동참하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면 빠르게 그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기도 한다.

처음에는 FTA의 일부 독소조항만을 제한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들도, 이명박이 경찰을 풀어서 사람들을 잡아가고 한나라당이 최루탄을 맞아가면서까지 날치기를 강행하는 것을 보며, 저들에게 재협상을 맡길 것이 아니라 아예 저들을 끌어내리고 FTA는 폐기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집트에서 30년 이상 집권해 온 무바라크가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수많은 노동자와 청년이 자신과 함께 거리에 서서 목숨 걸고 보안경찰과 맞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튀니지에서처럼 혁명이 가능하다고 용기를 갖게 된다. 또 무바라크를 무너뜨린 자신들의 힘을 확인했는데 이제 와서 군부에 만족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한국에서든 이집트에서든 지배계급은 사람들이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을 ‘군중심리’나 ‘좌파의 선동에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얼마전 동아일보와 뉴데일리의 ‘다함께’ 비난이 정확히 그랬다). 그들은 대중이 괴담에 빠졌거나 집단 최면에 걸린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진실은, 대중이 스스로 투쟁에 참가하면서 의식을 발전시키고 그 중의 일부는 더 급진적인 주장도 지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태준 동지가 옳게 제시한 “우익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예리한 비판”을 가하고 “넓은 범위의 연대와 참여를 이끌어”낸다는 과제는 투쟁을 확대한다는 과제와 대립되지 않는다. 최태준 동지가 제시하는 ‘지적 탐구와 대안 제시’도 이런 투쟁 건설과 연결될 때 더 효과적이고 구체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투쟁을 확대하려면 좌파는 헌신적으로 운동에 참여할 뿐 아니라, 운동 내 논쟁들을 들춰내고 대중이 가장 올바른 입장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개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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