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한반도 주변 정세는 어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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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한반도 주변 정세의 변화가 초미의 관심사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북한 체제가 불안정해지면 자칫 한반도 주변의 긴장이 고조될까 봐 우려한다. 이해할 만한 우려다. 분단과 한국전쟁 이래로 줄곧 한반도는 세계의 비교적 불안정한 지역의 하나였고, 이 때문에 남북한의 평범한 민중은 불안과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미국·중국·일본 등 주변 강대국들도 한반도 주변의 불안정화를 우려해 조심스러운 행보를 취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지배자들의 지정학적·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러는 것이다.
북한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이 가장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점차 영향력을 높여 온 중국은 그동안 동아시아의 불안정을 빌미로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우려해 왔고, 미국의 압박을 견제하며 북한을 꾸준히 지원해 왔다. 이번에도 중국은 북한 체제의 불안정화를 막고자, 주변국들 중 가장 먼저 조의를 표하고 탈북자 국경 통제를 강화했으며, 김정은 후계 체제를 인정했다.
미국으로 말하면, 미국은 그동안 ‘북한의 독재자가 미국 중심 세계 질서와 평화를 교란시키는 행동을 한다’며 북한을 악마화했고 압박을 일삼았다. 그리고 미국은 그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등을 북한 “급변사태”로 규정하고, 유사시 군사적 개입을 하겠다는 ‘작전계획5029’를 준비해 왔다.
그러나 근래 미국은 북한에 유화 조처를 취하기 시작했고, 이번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후에도 대북 압박을 높이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며칠 전에는 미국이 북한에 우라늄 농축 중단을 대가로 식량 지원을 약속했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대북 정책
이런 미국의 행보를 이해하려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속에서 대북 정책을 봐야 한다. 그동안 미국이 북한을 악마화하고 압박했던 것은 북한이 미국에 위협적인 존재여서가 아니었다. 북한은 그 경제력에 견줘 중무장한 국가이긴 하지만, 미국의 군사력에 댈 바가 못 된다.
북한이 미국에 맞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해 와서 미국이 북한을 적대시한 것도 아니다. 사실 소련 해체 이후 더 열악한 조건에 놓이게 된 북한은 WTO 가입 등 세계 시장에 편입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싶어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바랐다. 김일성은 1992년에 “미국에 가 낚시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2002년, 당시 일본 총리 고이즈미를 통해 “부시 대통령과 밤새 목이 쉬도록 노래 부르고 춤추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북한 정권은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면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도 표명해 왔다.
관계개선을 거부해 온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이 이런 태도를 취한 진정한 이유는 그들이 겉으로 말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미국은 냉전 해체 이후 동아시아에서 경쟁 강대국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해 왔다.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 동안 중국은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뤘을 뿐 아니라 군사력도 계속 증강해, 지금은 미국 패권에 잠재적으로 위협적인 국가가 됐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며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려면 동아시아에서 개입을 유지할 명분이 필요했다. 미국이 북한을 악마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일본을 동맹으로 묶어 단속하고, 이렇게 구축한 미일동맹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북한 압박은 모순된 결과를 낳았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 능력은 미국이 압박할수록 오히려 의혹으로부터 현실이 됐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보며 핵무기 없이는 미국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나름의 교훈을 얻은 북한은 미국의 압박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핵무기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런 모순 때문에,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행사하는 통제력은 매우 아슬아슬하다. 특히 부시 정부 하에서 미국은 중동 전쟁에 발목 잡혀 있느라, 동아시아 개입에 사용할 수단이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뚜렷한 전략 없이 협상과 제재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오바마 정부도 부시 정부와 다른 대북 정책을 펴겠다는 포부와는 달리, 경제 위기에 발목이 잡혀 북한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즉, 미국의 진정한 이해관계는 북한에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펴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고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미국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때도 3개월 후 제네바 합의에 서명하는 등 유화 조처를 취했다. 북한 체제에 극심한 혼란이 일어난다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통제력이 약화될까 봐 우려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북한의 평화적, 안정적인 전환”을 바란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는 사실상 북한의 3대 세습을 일단 용인하겠다는 뜻인데, 이것은 미국이 ‘민주주의’라는 잣대를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얼마나 멋대로 사용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강대국들의 개입과 불안정의 심화
주변 열강의 이런 행보를 보고 일각에서는 오히려 동아시아 각국이 불안정을 우려해 협력하지 않겠느냐고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각국의 ‘안정화’ 노력은 강대국들 간 서로 다른 이해 관계가 일시적이고 표면적으로 봉합되는 것일 뿐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질서는 강대국들 간 패권 경쟁 격화가 특징이다. 북한의 불안정성이 가져올 세력 판도 변화를 염두에 두고 물밑에서는 오히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모두 북한에서 불안정한 상황이 전개돼도 그 상황에서 득을 얻기 위해 서로 암투를 벌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북한 내부의 불안정성 심화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할 때는 군사력 투입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미국은 북한 “급변사태” 발생시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작전계획 5029’를 마련해 둔 상태다.
따라서 중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동아시아의 불안정성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북한 권력 체계 불안정성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계기일 뿐 동아시아의 불안정은 강대국들이 서로 자신의 패권을 강화하려고 경쟁하는 제국주의 체제의 본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불안정화를 우려해 북한 체제의 안정화를 지지하는 것은 실행 가능한 대안이 될 수 없다. 게다가 3대 세습을 하는 억압적이고 착취적 정권의 안정을 바라는 것이 민주주의와 진정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좌파의 태도일 수도 없다.
진정한 좌파라면 동아시아 불안정의 근원이 제국주의적 경쟁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제국주의적 개입에 반대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 정권과 체제의 안정화를 바랄 것이 아니라, 북한 노동계급이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투쟁에 나서기를 바라야 한다.